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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2.10.06 (목)

by 박인식

1.


국어사전은 친구를 친하게 사귀는 벗이라고만 정의하고 있을 뿐 어떤 경우에 친구가 된다고 조건을 달지 않는다.


십여 년 저자와 독자로 만났다. 그 오랜 기간 글을 읽어오면서도 저자의 얼굴을 몰랐다. 어딘가 사진을 올리셨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다. 페친이 되고, 그동안 펴내신 책을 차근차근 읽고, 온라인에서지만 교분도 나눴다. 그동안 써오신 글로 미루어 나보다 오 년 정도는 손위이실 거라고 생각했다. 주간조선에 오랫동안 영국 이야기를 써오신 권석하 선생이시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앉자마자 십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내 짐작이 맞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모습이나 열정이 오히려 손아래로 보이실 정도였다.


오 년쯤 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역사정치라는 글을 정독해왔다. 정치적 사회적 현안을 유사한 상황의 역사를 소환해 비판하는 글인데, 부드러움 속에 비수가 들어있는 글이어서 시원하기도 했고 뜨끔하기도 했다. 글도 그렇고 적절한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고 인용하며 그것을 현안으로 연결시키는 솜씨로 보아 내 또래거나 젊다고 해도 열 살 이상은 차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어느 날 신문에 사진이 올라왔는데 너무 젊어 보였다. 알고 보니 혜인 아범보다 두 해 손위이다. 조카가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할 때 면접관이었다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이다.


어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런던을 찾아올 생각은 윤영호 선생의 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공동저자이자 부인이신 윤지영 선생과 함께 어제 만나 시공을 넘나드는 대화로 이미 십년지기가 되었다. 저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감사했지만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인께서 혹시 불편하게 여기실까 싶어서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다. 말이라도 건네 볼 걸.


그래서 오늘은 좋은 친구들과 꼭 사진 한 장을 남기리라 작정을 했다. 권석하 선생께 저녁 잘 대접받고 영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역사, 정치를 넘나들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둘러 사진 한 장 남기자고 청했고 이렇게 남겼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오른쪽부터 윤영호 선생, 권석하 선생, 유성운 기자, 그리고 이 세 분께서 쓰신 글의 열혈독자.


20221006_221752.jpg


2.


오래 전 출장길에 런던에 들렀을 때 지사 직원이 어디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워털루 다리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뜻밖으로 들렸던지 어디 가자는 거냐고 되물었다. 버킹엄도 아니고 웨스트민스터도 아니라 워털루 다리라니. 내리고 보니 뜻밖으로 여길 만 했다. 정말 밋밋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개 자욱한 워털루 다리에서 로버트 테일러가 비비안 리를 생각하며 그녀가 건네 준 조그만 마스코트를 꺼내보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흑백영화 <애수>는 원제가 <워털루 브릿지>였으며, 내게는 영화의 상징 같았던 작품이었다. 영화를 실제로 그 장소에서 촬영했는지 알 길도 없고 영화에는 안개에 가려진 다리 일부만 보였으니 그 다리를 특별히 아름답다고 여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마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탓이었을 것이다. 아침나절에 워털루 다리 난간에 서서 로버트 테일러가 서있던 자리가 어디쯤이었을까, 오늘 내가 보는 모습 중에 그가 본 모습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했다.


20221006_093615.jpg <로버트 테일러가 서있던 워털루 다리 난간에서 내려다 본 풍경>


3.


언제부턴가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객으로서가 아니라 주민으로서 누리를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는 그것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들어가 햇살을 받고 바람을 느끼며 유유자적을 누리고 싶었다. 책 읽다가 졸리면 내쳐 자기도 하고. 물론 일상이 그리 여유롭기만 할까마는.


20221006_095937.jpg <이름하여 English Full Breatfast, 일단 양이 많아 든든함>
20221006_105437.jpg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예배 성찬>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면 감흥이 떨어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곳을 찾아도 더 이상 마음이 설레지 않고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도 데면데면 하는 것은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이고, 기대가 없는 것은 기대에 미친 경우를 보지 못한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고, 학습효과는 그동안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기대를 접고 타인의 일상을 누릴 수 있다면 그들에 대한 이해라도 늘릴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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