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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24. 2022

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

김형민

믹스커피

2022년 10월 4일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


나는 저자가 ‘산하’라는 필명을 쓰는 이인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산하’라는 필명도 처음 들었다. 글 곳곳에 날이 서있었고 지향하는 바가 나와 다르기는 했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겪었을 것 같지 않은 사건 사고도 구체적으로 해박하게 풀어내는 솜씨에 끌려 독자가 되었다. 알고 보니 사학과 출신이었다. 내게 사학과를 나와서 일간지 기자를 하는 조카가 있다. 대학 다닐 때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니 짐작했던 대로 기자를 택했고, 지금까지 잘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다른 일간지에 역사정치를 주제로 다루는 기자의 글을 애독하고 있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사학과 출신은 워낙 글을 그렇게 잘 쓰느냐고 묻다가 그 기자가 조카 입사시험 면접관인 줄 알게 되었다. 아마 저자와 동문이지 싶다.


신념에 관한 것은 다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양보할 수 있으면 신념이 아니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맴돌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말이다. 종교가 그렇고 정치가 그렇다. 그래서 그런 글은 가급적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 거기에 쓸 마음도 시간도 아깝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을 읽는 경우가 간혹 있다. 다른 글을 읽기 위한 구독료 삼아서.


저자의 글은 흡인력이 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저자는 주로 사건 사고를 중심으로 하는 시사 현안을 다루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근현대사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그동안 사학과 출신이 아닐까 짐작만 했고,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글에 날이 서있는 건 아마 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학도인 내 눈에도 정치는 날로 최악을 갱신하고 있는데 사학도인 저자의 눈에는 오죽하겠나. 그래서 요즘은 그동안 구독료 삼아 읽던 저자의 다른 글도 정독하고 있다. 마침 신간과 관련한 자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책을 읽었다.


저자의 글에 날이 서있고 때로는 조롱으로 여겨질 만한 표현이 적지 않은데도 그것을 읽는 것은 바닥에 깔려있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도 진영논리와 결합하면 괴물이 되는 건 순식간 아닌가. 그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저자는 일본 전공투를 주제로 삼은 글에서 “사회운동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지만 대개 추진과정에서 인간의 희생과 배제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이며, 사회운동의 대의가 개별 인간의 권리와 일상을 넘어서는 거인이 될 때 그 거인은 인간을 잡아먹기 십상(p.72)”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날을 세우면서도, 때로는 조롱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글을 정독하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그런 자세는 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미란다 원칙 또한 그런 바탕 위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미란다 원칙은 범인을 잡는데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백은 증거의 여왕’이라고 해서 어떻게든 자백만 받아내면 만사 오케이였던 관행에 경종을 울려 수많은 가짜 범인의 양산을 막았고 합리적인 증거와 증인을 통해 범인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천하의 나쁜 놈, 연쇄살인범에게까지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으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때 일반 시민의 권리 또한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p.36)


흉악한 범죄자까지도 인간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서 인간 존중을 실현할 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권리를 더욱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범죄의 구조적 배경


저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범죄 50개’를 가려 뽑아 그가 써온 여느 글처럼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당시의 시대로 이끌어 간다. (그런데 글은 왜 51꼭지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짚어나간다. 저자가 언급하듯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상당수는 악한 개인의 품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곳곳에서 죄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고 배경과 맥락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 구조적인 문제에 접근해 이를 해결함으로서 범죄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존파 사건을 다룬 글에서 그들을 체포한 강력반장이 “지존파 일당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엄청난 상대적 빈곤이 괴물을 만든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주의 깊게 되새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고리타분한 도덕률만은 아니다. 죄인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죄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배경과 맥락을 생략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인간 이하의 범죄자로 낙인찍고 책임을 지우는 건 쉽지만, 범죄를 낳은 환경을 개선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하는 노력은 그만큼 어렵다.” (p.264)


이어서 홍콩의 영국경찰 부패상을 다룬 글에서 저자는 “범죄자를 잡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런 범죄를 구조적으로 원천 봉쇄하는 일(p.29)”이라고 말한다. 또한 간첩 이야기를 다룬 2부 4장에서는 “간첩을 막기 위해서는 의심나면 신고하는 경각심을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을 해결하는 데서 시작해야(p.362)” 한다고 지적한다. 당연한 말이다.


저자는 나름의 기준으로 선정한 50가지 범죄사건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각각의 범죄가 지니는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이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것은 이 책의 취지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독자로서 그의 서술이 당연한 지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괄적이라도 구조적 문제를 살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손에 쥐어줘야 아는 나 같은 독자도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가까워서 불편한 일본


한동안 반일 광풍이 일었던 때가 있었다. 불과 한두 해 전 일이다. 스스로 진보로 자리매김한 이들이 ‘죽창가’ 운운하며 말도 되지 않는 선동에 나설 때 저자는 그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표시한 글을 올렸다. 초록은 동색인 줄 알았는데. 아마 이때부터 구독료라고 여기고 읽던 그의 글을 정독하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기조는 이 책에서도 시종일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사건을 다룬 글에서 저자는 “민족주의는 애국심에 대한 배신(p.22)”이라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 발언을 인용하며 요 몇 년 사이에 극성을 부리는 친일의 낙인과 반일의 함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적어도 우리 독립지사들은 일본의 절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와 공존공영을 꿈꿨다면서 말이다.


일본도 사람 사는 곳이다. 사사로운 경험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은 개인일 때와 집단일 때가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업무로 일본 엔지니어들과 여러 차례 만나면서 내가 ‘일본(이라는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 ‘일본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친절하고 합리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그와는 너무도 달랐다. 저자는 1921년 도쿄에서 일본인 17명을 살해한 조선인을 다룬 글에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 범행이 혹심한 민족차별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p.252) 그 결과 2심에서 징역 7년6개월로 감형되었을 뿐 아니라 피해유족을 위해 걷은 부조금 일부를 범인의 가족에게도 나눠줬다고 한다. 그도 역시 피해자라는 것이다. 


저자는 하지만 그들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학살했다며, 살인범의 가족까지 챙겨준 일본과 관동대지진 때 죽창을 들고 조선인을 죽이려 든 일본이 같은지 다른지 묻는다. 집단과 개인의 차이는 아닌 것 같고.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사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도 그들과 그리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도 우리처럼 ‘눈을 부라리는 목소리 큰 소수’에 휘둘리는가?


시대를 읽는 기준


나는 대통령은 한 사람이 하는 건 줄 알고 자랐다. 졸업하고 나서는 먹고 살기 바빠서 다른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철학이 빈곤한 탓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80년대에 일었던 민주화 열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몰랐다. 너무 익숙해 있던 것이 하루아침에 공공의 적이 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마 2천년 들어서기 얼마 전이지 싶다. 라디오에서 심상정 씨가 패널 세 분과 대담을 나누던 중에 80년을 기점으로 이전을 산업화 시대로 이후를 민주화 시대로 나누면서, 서로의 가치가 달랐던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 발언으로 내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저자는 철강왕 카네기를 다룬 글에서 그의 악덕 기업주로서의 면모를 지적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지금의 잣대로 재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카네기가 악인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당시는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시대로부터 놓여난 직후였고 최악의 자본주의가 천하제일의 미덕인 양 사회를 지배할 때였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 카네기 역시 최선을 다해 살면서 자신의 이익을 실현했던 탁월한 기업가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이 당시 범으론 범죄가 아니었거나 돈의 힘으로 법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 아니, 그게 당시의 법이었다.” (p.110)


그러면서도 “오늘의 합법은 누군가의 목숨을 건 불법으로 이뤄진 것이고 내일의 상식은 오늘 누군가의 ‘이의 있습니다’라는 외침에서 출발한다”며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지니는 가치를 재삼 환기시킨다. 그것이 내가 그의 글을 정독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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