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이 역사와 만나다
이상우, 유성운
포레스트 북스
2022년 10월 11일
요즘 부쩍 경제를 다루는 매체가 많아졌다. 걸어 다닐 때면 으레 경제 방송을 듣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중 으뜸가는 주제인 이재에 관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가는 방편으로 여길 뿐이다. 이재에 관한 것이라면 주식과 부동산을 꼽을 수 있는데, 주식은 해본 일이 없고 집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사는 곳으로 여길 뿐 축재의 수단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는데 바빠서 주식과 부동산에 손댈 겨를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뒤떨어졌고, 뒤떨어지다 보니 마치 초연한 척하고 산다. 실은 탈락되었으면서 스스로 떨어져 나온 연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의 글을 읽어왔다. 사학과 출신답게 시사현안을 역사에 빗대어 설명하는 글 솜씨가 여간 탁월한 것이 아니어서 그의 글은 놓치지 않고 챙겨 본다. 지난달에는 기회가 닿아 런던에서 연수중이던 그와 식사를 나누며 그의 글에 대한 애정을 십분 피력한 바가 있다. 그때 이 책이 곧 발간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부동산 전문가와 함께 교육ㆍ직주근접ㆍ교통ㆍ환경ㆍ도시계획 이렇게 다섯 가지 요소가 부동산의 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망하는 책이라고 했다. 각 주제마다 먼저 유성운 기자가 관련한 역사를 고찰하고 이어서 부동산 전문가가 현황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부동산에는 관심이 없지만 시사현안을 역사에 빗대어 풀어내던 그의 글 솜씨가 부동산에는 어떻게 접목될지 궁금했다.
읽으면서 다섯 가지 요소 중에 교육과 교통 두 가지가 아주 흥미로웠다.
과거에도 시간이 갈수록 인구도 늘고 각종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는 점차 번영을 이뤘는데 저자는 그 원동력 중 으뜸가는 것을 교육으로 꼽는다. 조선 건국 세력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새 수도를 살릴 방안 중 하나로 학교를 네 곳 설립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기본적으로 사학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고려 때 기득권층이 구재학당(문헌공도)을 통해 어떻게 인맥을 맺고 권력을 독과점 했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 권력을 잡자마자 구재학당 등 주요 사학부터 폐쇄했고 그곳 학생들을 모두 성균관으로 전학시키는 강수를 뒀다. 사실 천도 후 조선은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개경에 사는 명문세가들이 조정을 따라 한양으로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프라가 부족한 새 수도 한양보다는 사백 년 고도이자 인프라가 풍부한 개경이 살기 좋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한양에 학교 네 곳이 세워졌다. 새 수도를 살릴 방안으로 교육 수요를 겨냥했다는 말이다.”
좋은 학교는 좋은 교육을 받는다는 점에서 누구든 선망하지만 그 못지않게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시간이 흐르면서 증폭되게 마련이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모두 15,151명이었는데 그 중 한양 출신이 5,515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 또한 과거 급제자가 100명 이상 나온 가문 중에서 한양 출신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만 해도 60% 정도였던 것이 17세기 후반엔 74%로 증가하고, 19세기에 이르면 80%를 넘어선다. 시간이 갈수록 한양의 특정 가문에서 급제자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가능했다. 상위권 대학에 지방 출신이 흔했고 공부 하나로 계층 상승을 이룬 예가 사방에 널렸다. 이제는 상위권 대학의 학생들 중 서울, 그 중 강남 3구 출신의 비중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그래서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그곳으로 이사 가야 하는 게 상식이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당연히 집값 상승으로 이어지고.
저자가 인용한 자료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서울대 합격이 곧바로 과거급제처럼 느껴지는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국무총리인데 (대통령이 선출직인 것과 달리 국무총리는 임명직이기 때문), 지금까지 임명된 국무총리 48명 중 23명이 서울대학교 출신이란다.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경기고등학교이다. 1974년 고교평준화로 그런 경기고등학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한 번은 경기고등학교를 나오신 직장상사의 동문수첩을 본 일이 있었다. 당시까지 생존해 있는 졸업생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절반은 되어 보였다. 모두 권력과 재력과 명성을 지닌 유명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풍수도참설에 따른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수도 이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을 뿐 사실은 교통과 유통을 고려해 위치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수도 결정 과정에서 좌의정 조준 등은 한양은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는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있으면서 교통과 유통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낙점된 것이지 단순히 풍수적 근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당시 한양의 탁월함을 설명하면서 풍수도참이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도 이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을 뿐이다.”
도시가 발달하는 데는 교통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그런 도시가 물류와 유통의 중심이 되고,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권문세가가 태어난다는 말이다. 저자는 선산에 진성 이 씨 집안이 뿌리 내린 것과 그런 선산이 충주와 함께 뒤쳐진 것을 예로 들어 이런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선산은 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시대부터 많은 물자와 사람이 이곳을 거쳐 이동했다. 조선이 개국한 뒤 영남대로가 개설되면서 그 역할이 더욱 막중해졌다. 한양-충주-대구-부산을 잇는 영남대로가 선산을 관통하면서 이곳은 그야말로 영남의 물류와 유통의 중심이 되었다. 자연히 사람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우리가 잘 아는 퇴계 이황의 진성 이 씨 집안도 이런 과정에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1905년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서울-천안-대전-김천-대구-부산 라인이 새롭게 부각됐고, 이전 조선시대에 빛을 봤던 영남대로 라인 즉 용산-죽산-충주-문경-상주-선산-안동-대구-밀양-동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철도 덕분에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수운은 영향력이 감소했다. 충청도의 중심은 경부선이 지나는 대전으로 점차 이동했고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는 충주의 낙후화에 결정적 쐐기를 박았다. 경부선에서 소외된 지역들 위주로 그나마 제한적으로 이어지던 수운은 이제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경부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 충주는 대전은 물로 청주에도 완전히 밀리는 신세가 됐다.”
또한 한양 출신이 휩쓸던 문과 급제자 중에 한양 다음으로 뜻밖에 평북 정주가 꼽힌 것도 도로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5,151명 중 한양 출신이 5,515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다음이 평북 정주라는 점이다. 평안도나 황해도 같은 서북지방은 조선시대 지역차별을 받은 지역으로 알려졌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바로 도로였다. 조선시대에 가장 좋은 도로는 한양에서 최대 무역국인 중국과 국경에 이르는 통로이자 사신들이 이용하던 한양-개성-황주-평양-안주-정주-의주 길이었다. 도로를 따라 산업자본이 이동 축적되었고, 이는 교육 기반 구축으로 이어져 큰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교통과 관련한 글을 읽다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을 접했다. 한반도는 과거부터 수운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수운이 발달한 한반도는 바다에 바로 접하는 하구보다는 바다의 조류가 육지로 들어오는 한계선, 다시 말해 내륙으로 조금 들어오는 지역이 더 번성했다. 고대사회에서 군사적ㆍ경제적 이유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철과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소금ㆍ곡물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서울(한강), 평양(대동강), 공주(금강), 나주(영산강)이 그 예이다. 서울에서 한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면 북한강과 남한강을 통해 춘천, 충주, 단양, 영월까지 닿는다. 즉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연결되는데, 육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는 엄청난 이점이었다. 서울과 한강으로 연결된 충주와 단양은 고대사회의 핵심 자원 중 하나인 철이 나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 대통령이 주장한 한반도 대운하가 영 뿌리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상식 삼아 과거 집값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인용하자면,
“조선왕조실록에 인사동 30칸짜리 집이 종9품 관리의 녹봉 50년 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9급 공무원 연봉(약 3천만 원)을 대입하면 15억 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칸은 지금 평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30평 주택이 15억 원인 셈이니 지금 집값이 비싸다고 문제 삼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서 역사가 중요한 모양이다. 역사에서 이재의 기초를 쌓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역사를 공부한 기자와 부동산 전문가가 만나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로 책을 썼다. 좋은 시도이기는 한데 요소별로 두 저자의 글을 묶어놓은 것이 그다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각 저자에게 주제를 제시하고 그 글을 받아 병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두 글을 물리적으로 결합할 것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아마 저자보다는 편집자의 몫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