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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24. 2023

<소설>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1판 2010년 8월 20일

2판 2019년 1월 29일


나는 창작하는 사람들이 늘 감탄스럽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무엇인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표현의 문제이니 훈련하면 되는 일이지 창작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곡이 그렇고 소설이 그렇다. 소설 중에서도 장편 소설은 더욱 그렇다. 사건을 씨줄날줄 엮듯 엮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전적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마치 작곡과 편곡의 차이처럼.


십 수 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고 스무 개 넘는 나라에 판권이 팔렸다는 소설을 이제 알게 되었다. 제목도 낯설고 소설가도 낯설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저히 있을 것 같이 않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일으키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들을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고 암살자라고 부른다. 살인(murder)이 단발성이라면 암살(kill)은 연속성, 살인이 우발적이라면 암살은 계획적, 살인이 개인적이라면 암살은 조직적. 이 정도 차이가 아닐까. 그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푸주에서는 안구, 콩팥, 폐, 간 같은 불법 장기들로부터 사제 폭탄, 독극물, 동남아와 북유럽 여자들,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된 값싼 마약들, 미군부대에서 빠져나온 총기들을 살 수 있다. ... 푸주에서는 복수를 살 수도 있고, 환희를 살 수도 있고, 파멸을 살 수도 있고, 갱생과 부활의 새 인생을 살 수도 있다. 5백 달러만 쥐어주면 사람을 죽여주겠다는 불법 체류자를 살 수도 있고, 자신의 거지같은 인생을 대신해서 깔끔하게 죽어줄 사람이나 시체를 살 수도 있다. ... 남편을 사고로 죽여서 보험금을 타내고 남은 인생을 화끈하게 살겠다는 유부녀 정도는 푸주에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암살이 연속적이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일이라면 암살 설계자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살해 전 과정을 계획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살해방법까지 명시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선정한 이유는 밝히지 않는다. 암살자도 알려고 들지 않는다. 암살은 준비와 실행과 뒤처리로 나뉘는데, 실행과정에서 변동이 생기면 뒤처리 계획도 흐트러지기 때문에 설계자는 조금의 변주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돈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그들의 생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라는 킬러가 설계자가 계획한 대로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대상이었던 고급 콜걸을 살려 보내는 일이 일어난다. 그는 그녀에게 “네가 아는 그 어떤 곳으로도 돌아가지 마라. 그러면 죽는다”라고 충고한다. 킬러는 어차피 이유를 따지지 않는데, 그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튼 그녀는 익숙한 자리로 돌아와 결국 주인공 ‘래생’의 손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녀를 찾아낸 ‘래생’은 낡은 여관으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는 방에 들어와서 곧장 옷을 벗는다. 그리고 옷은 벗지 않고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는 래생을 향해 “빨리 하죠? 나 바쁜데”하며 재촉한다. 잠시 후 그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옷을 입어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래생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옷을 벗은 채로 죽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몸에 상처 나는 것이 싫으니 그렇게 해줄 수 있나요?”라고 부탁한다. 래생은 목을 꺾어 죽이라는 설계를 따르지 않고 바르비투르산염이라는 극약을 먹여 죽인다.


이 소설은 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두 집단의 대결로 귀착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킬러가 굳이 어떤 여인에 대한 설계를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중요한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가 사는 곳을 역겨워하면서도 역겨운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역겨움이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 익숙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죽음에서 놓여났던 여인이 다시 죽음의 자리로 찾아오는 부분을 설명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을지도.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이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국내 소설로는 유례없는 기록을 많이 세웠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한국 작가들이 스릴러 장르를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국내 작가 최초로 프랑스 추리문학대상 후보에 올랐으며, 시카고리뷰오브북스 ‘올겨울 최고의 스릴러 15’, 영국 골즈보로 서점 ‘1월의 책’, 범죄소설 웹진 크라임리즈 ‘1월에 읽어야 할 책’, 리터러리허브 ‘이달에 읽어야 할 책’, 북스앤드바오 ‘2019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 등에 선정되었다.”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었는데도 내쳐서 끝까지 읽었다. 재미있는지는 모르겠고 잘 읽히기는 한다. 읽으면서 결말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빠져들었다고 할까. 아무런 느낌도, 교훈도 얻은 것이 없다. 그저 그런 삶이 있구나, 아니 그런 삶이 가능한가? 뭐 그런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작가가 궁금해졌다. 인터뷰를 보다가 소설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찾았다.


“소설책에서 뭘 찾으려고 하지 말라. 의미든, 교훈이든, 메시지든. 소설은 그런 장르가 아니다. 책을 통해서 다른 삶을 한 번 살아보는 것이지, 교훈을 얻거나 자기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 여러 개의 삶을 대신 살아보면서 삶을 확장하는 게 핵심이 아닐까. 대한민국 교육은 맨날 밑줄 긋고 주제 찾는 일을 가르친다. 소설은 그냥 읽고 그냥 살아보는 것이다. 재미없다거나 내가 살기는 좀 빡빡하다 싶으면 그냥 던져버려야 한다.”


생각해 보니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건진 게 없었다는 말인데, 그게 작가가 원하는 충실한 독자였단다. 소설을 이야기로만 읽는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 몇 개를 찾아 놨다.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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