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문학동네
2022년 8월 3일
몇 가지 질문이 생겼다.
1.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이다.”
김훈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작동을 멈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살인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이룬 결과가 살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뮈텔 주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안중근이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고, 안중근은 1993년 김수한 추기경이 안중근 추모미사를 집전할 때까지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저격이 있기 한 해 전에 안중근은 연해주 의병의 참모중장이 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 사병 두 명과 민간인 한 명을 생포한다. 포로는 늙어보였고 강제로 전쟁에 끌려왔다며 살기를 구했다. 그는 “이자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고, 그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자 그들을 풀어준다. 총기가 없으면 군법으로 처형된다며 총기를 내어주기를 청하는 포로들의 부탁도 들어준다. 석방된 포로는 돌아가서 안중근 부대의 위치와 병력규모를 보고했고, 일본군들이 회령에서 사방을 포위하고 조여들어올 때 안중근 부대는 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산속에서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그때 죽였어야 옳았던가를 안중근은 스스로 물었다. 안중근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심문하는 일본 검찰관에게 이토 저격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안중근의 그런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모순 같은 위의 두 사건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일본인인데 누구는 그런 이유로 멈춰 세우고 누구는 돌려보냈으니 말이다.
질문) 동양평화를 위해 가족을 희생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는 일인가?
2. “이인영은 여러 고을의 의병들과 연합해서 통수계통을 세우고 스물네 군진을 편성했다. 서울을 회복하려고 동대문 밖에 병력을 집결시킨 기는 부친의 별세를 알리는 부고가 도착하자 상을 치르러 고향으로 내려간다. 부하들이 울면서 매달렸으나 붙잡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이인영의 부대는 지리멸렬해졌고, 일부는 배반하고, 일부는 배반한 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질문)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왜 하는 것인가?
3. “안중근이 천주교인인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뮈텔은 안중근은 이미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 주교는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 다시 세속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했다.”
질문) 교회의 존재이유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