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하빌리스
2019년 5월 24일
어머니 고향이 평안도이시다 보니 끼니때가 되면 늘 밥과 국과 김치에 반찬 한 가지, 많아야 두 가지 정도 놓고 먹었다. 식사라는 게 으레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처가에서는 밥과 국을 빼고도 반찬이 열 가지 아래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직장에 들어가 출장을 다니다 보니 호남 음식은 그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출장 가지 않을까 이리 빼고 저리 빼다가도 호남 쪽에 출장갈 일이 생기면 서로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요즘 유튜브에 외국 사람들이 한정식 먹으면서 감탄하는 영상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그래도 출장 다닐 당시 호남 음식에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예전에는 그것을 그저 백반이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한정식이라고 부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궁중음식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요즘은 궁중 드라마를 통해 수라간이니 대령숙수니 제조상궁이니 하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연속극 장면 하나도 철저하게 고증을 한다니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한정식은 궁중이나 사대부가의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맛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하나둘 보이면서 우리 음식에 대한 논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궁금하던 차에 우리 음식에 대한 신뢰할만하다고 평가 받는 책 하나를 알게 되었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2008년부터 음식공부에 매달리고 있다고 했다. 음식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음식의 기원을 역사문헌을 통해 고증하고 있다는 말에 관심이 끌렸다.
저자는 한반도에는 향토음식이 없었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향토음식은 허상이고, 한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향토음식이라는 것은 일본식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번이라는 독립적인 행정기구로 이루어진 지방분권국가였다. 그리고 각 지방은 높은 산악으로 나뉘어 있어 지방마다 독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의 지방 수령인 관찰사, 감사, 목사, 현감은 중앙에서 녹봉을 받는 국왕의 신하였다. 중앙집권제였고, 그래서 음식을 비롯한 문화가 이들을 통해 뒤섞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음식이 지방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면 조선의 음식은 계급별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은 유교 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도구로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대접하는 도구(奉祭祀接賓客)였다. 유교적 가치관을 음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요즘 여러 곳에서 열리는 축제마다 우리 지방의 고유의 음식, 향토음식이 나타나지만 정작 현장에 나타나는 음식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음식인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궁중음식은 민간에서는 먹지 않았던 궁중만의 음식이거나 혹은 궁중에서만 사용한 비법으로 만든 음식일 것인데, 저자는 우리나라에는 그런 음식이 없었다고 말한다. 임금 수라상도 여염집 밥상과 다를 바 없었단다. 우리가 궁중음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국가적인 행사나 종묘에 올리는 제사음식을 착각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가장 화려한 밥상은 종묘에 대한 제사다. 외국 사신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왕의 밥상이 호화로웠다는 오해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진찬의궤니 진연의궤니 하는 음식을 왕의 밥상으로 오해한 것이다. 오늘날도 환갑잔치, 아이들 돌잔치에 내놓은 밥상이 일상의 밥상은 아니다. 하물며 정조가 내놓은 어머니의 환갑날 잔치 밥상을 두고 궁중음식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잘 차린 밥상을 흔히 9첩 반상이니 12첩 반상이니 하고 부르고 있지만 저자는 ‘첩’이라는 표현이 조선시대 어떤 공식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도 첩은 한자 표현이 없는데, 한자 표현이 없는 단어는 공식 문서에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식 문서에는 이두 표현을 이용하더라도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용어라는 말이다.
한정식의 뿌리로 여겨지는 궁중요리의 전수자로 알려진 안순환은 대한제국 말기 9품 전환국 기수, 다시 말해 조폐관리기관의 하급 기술직이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음식을 만들지 않았고, 그러니 조리사도 아니고, 조선의 마지막 대령숙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우스운 것은 조선 왕실 직책에 대령숙수라는 벼슬도 없었다는 것이다. 안순환은 친일파와 일본을 등에 업고 호화술집인 명월관을 운영한 술집 운영자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궁중요리, 한식의 ‘호화로운 밥상’의 뿌리는 안순환의 명월관에서 시작되었다. 간악한 시중 잡배를 ‘궁중에서 임금님 밥상을 책임진 한식 전승 조리사’로 떠받들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궁중요리’의 전수자로 모셨다. 한식이 안순환을 통해서 전래되었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했다. 그걸 물려받아 ‘궁중’ 이름을 달고 음식을 팔아먹었다. 안순환이 그린 술상은 일상적인 왕의 음식이 아니었다. 진찬의례나 진연의궤에 나타나는 음식을 왕의 음식이라고 과장했다. 안순환의 명월관 술상은 이미 청과 일본의 음식이 무분별하게 뒤섞인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왕의 밥상’에 일제 강점기 청나라와 일본 음식들을 새롭게 더한 것이었다. 이 요리상이 해방된 한반도에 그대로 전해졌다. 이 밥상이 오늘날의 한식, 한정식 밥상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한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밥상과 술상이 합쳐져 기형적인 모양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식의 한상차림은 밥과 국과 반찬으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반찬은 그저 밥을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반찬이 호화스러운 것은 워낙 술안주였다고 한다. 술은 맛이 강하기 때문에 밥맛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니 술안주가 되려면 맛이 강해야 한다. 술과 대적하여 겨룰 음식은 맵고 짤 뿐 아니라 보기에도 화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화려하기 짝이 없는 호남음식도 워낙 밥상이 아니라 술상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런 식당에 끼니 때우러 가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곳은 그저 그것이 술상이었고 따로 안주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런 사정은 술집에 가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밥집과 술집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저자는 우리 음식은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는 음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역적 특산물이라고 할 것도 기실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드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식재료가 바뀌면 음식도 달라지는 것이니 차라리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것이 한식의 특질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한식의 특질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고추는 남미, 유럽,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오늘날 고춧가루를 많이 넣은 채소 발효음식인 김치는 한식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김치의 재료인 배추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장에 사용하는 결구배추는 한반도에 정착한지 60년 정도이다. 이전에는 모든 김치를 비결구배추, 즉 속이 차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1950년 이전에는 한반도에 결구배추가 없었다. 생강과 마늘도 수십 년 전 품종과는 전혀 다르다. 젓갈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한반도 천일염의 역사도 100년 정도이다. 전통이니 정통이니 최초니 최고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고 허망하다. 김치의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힘과 다양함을 특질로 내세울 일이다.”
아울러 지금 우리 음식문화가 달라진 것을 몹시 아쉬워한다. 아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스러워졌다고까지 표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주장에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한식 밥상에는 펄펄 끓는 국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국물은 솥에서 끓인 다음 그릇에 퍼 담아 내놓는다. 솥에서 그릇으로, 상에 올리는 과정을 거치며 어느 정도 식는다. 국물은 따뜻하다. 뜨거운 것이 아니다. 이게 원래 모습이다. 주방도구는 그릇과 다르다. 주방도구는 부엌에서 사용하고 그릇은 상에 놓는다. 솥과 냄비는 주방도구이다. 이게 밥상으로 올라온다. 아니다. 주방 도구로 조리한 다음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은 다음 밥상에 올려야 한다. 설혹 냄비, 솥이 밥상에 오르면 주걱이나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은 다음 먹어야 한다.”
저자는 한식의 참 모습을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라고 정의한다. 검박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은 상스러운 것이고.
나이가 드니 가능한 부담스러운 음식은 피하게 된다. 그래서 육류보다는 생선을, 생선보다는 채소나 나물에 손이 간다. 그런 면에서 중식보다는 일식이 편하고 한식 중에서는 사찰음식이나 채식이 편하다. 그런데 요즘은 사찰음식도 다양하고 화려해졌고 코스요리처럼 내놓기도 한단다. 저자는 당연히 그것이 사찰음식일 수 없다고 반박한다.
“사찰음식은 스님들이 일상적으로 먹거나 신도들과 나누던 음식이다. 소박하고 양념을 절제하고 양도 줄인다. 맛과 색깔도 절제한다. 무덤덤하고 무채색이다. 아름다운 음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맛, 향, 색깔을 더하지 않은 무위의 음식이다. 바탕으로 돌아가는 음식이다. 더하는 음식이 아니라 빼는 음식이다. 화려하고 맛있게 만들 줄 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멈추는 음식이다.”
먹기도 그렇고 먹고 나서도 편하기는 한데 사실 맛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물은 그와 다르다. 관동지방으로 출장을 갈 때면 빼놓지 않고 찾는 집이 있다. 진부에 있는 산채식당이다. 저자는 산채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한다.
“산채(山菜)는 한반도에서만 사용하는 한자 표기이다. 일본에나 중국에는 산채가 없다. 일본에는 야채가 있으나 산채는 없다. 들나물은 먹었으나 산나물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산나물은 반가, 상민 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귀하게 사용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세상을 떠난 왕실 어른을 모시는 제사가 가장 귀한데, 종묘 제사에서도 산나물을 올렸다.”
그리고 산채의 다양한 모양과 맛을 이렇게 표현한다.
“같은 나물이라도 새싹, 줄기, 잎의 맛이 다르다. 같은 취나물이라도 참취, 곰취, 수리취, 단풍취, 미역취의 맛이 다르다. 우리 시대는 나물마다 맛이 다르고 나물의 부위마다 다르며, 계절마다 맛이 다른 나물의 다양한 맛을 버렸다.”
진부의 그 식당도 그렇고 서울에도 간간히 보이는 산채식당을 찾을 때면 아무런 양념도 더하지 않고 그냥 나물만 넣고 비빈다. 기껏 더해야 참기름 한 방울 정도이다. 산채의 향을 느끼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시켰는데 그 향을 고추장 맛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기왕 내친 김에 저자가 소개하는 나물의 종류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나물은 숙채(熟菜), 침채(沈菜), 생채(生菜)가 있다. 사찰 음식의 중심은 햇볕과 그늘에 말리고, 말리는 과정에서 발효 숙성시킨 나물들이다. 어차피 온 나라가 다 먹을거리가 귀했다. 산중의 사찰은 더 가난했다. 푸성귀라도 구할 수 있는 봄, 여름, 가을은 몰라도 겨울이면 굶는 수밖에 없다. 겨울을 대비하는 방법은 말린 나물인 숙채라도 충분하게 저장하는 일이었다. 침채는 삭힌 채소인데, 김치도 침채지만 각종 장아찌도 침채다.”
“삼계탕은 수삼과 닭고기를 푹 곤 것이다. 대추와 찹쌀도 넣는다. 황기나 엄나무를 넣기도 한다. 불과 50~60년 정도의 역사뿐이다. 조선시대에 수삼이나 인삼을 넣은 음식이 있었을 리가 없다. 인삼은 귀한 약재였다. 인삼(산삼)은 채취, 재배, 가공, 유통까지 국가가 철저하게 관리했다. 인삼은 건삼이나 홍삼이었다. 재배 인삼은 18세기 중후반, 정조대왕 시절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그 전까지는 상민은 채취 의무만 있고 권문세가에서도 아주 드물게 만났다. 인삼과 닭 생산이 늘어나고 냉장 유통이 가능해진 1960년대에 삼계탕이 생긴 것이다.”
“개고기는 조선시대 내내 상식을 했던 식재료다. 물론 보신탕은 아니다. 한양 도성에서 늦은 밤에도 쉽게 먹을 수 있던 음식이 개장국이었다. 개장국은 보신탕이 아니었고, 조선 후기의 길거리 주막 주요 메뉴였다. 먹을 만한 짐승의 고기가 개고기였기 때문이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도구여서, 말은 교통수단이어서, 돼지는 곡물을 많이 먹고 기후도 맞지 않아서 먹을 수 없었다. 만만하니 개와 닭이었는데, 닭은 개체가 작으니 업소용으로는 개가 제일 만만했다.”
“잡채의 원형은 여러 가지 숙채(묵힌 채소)의 모둠이다. 광해군 시대의 잡채는 약 열 가지 정도의 숙채로 만든 익힌 채소 모둠 쟁반이었다. 잡채의 잡은 잡스럽다거나 잡동사니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아니라 여러 가지, 골고루라는 긍정의 뜻이다. <음식 디미방>에서는 잡채를 ‘열거한 나물을 꼭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형편 닿는 대로 사용하고 바꿔도 된다’고 열어두었다. 잡채는 열린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