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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1. 2023

<영화> 다음 소희

감독; 정주리

주연; 김시은 배두나


졸업을 앞둔 열여덟 고등학생인 소희는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다. 현장실습생에게조차 실적에 대한 압박을 가하며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소희는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언제나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춤추는 것을 사랑하고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던 그였지만, 고객의 폭언과 상사의 압박을 견디기엔 턱없이 약한 존재였다. 피해자가 생겼으니 가해자가 나타나야하는데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피해자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콜센터에서는 육백 명 넘는 직원 중 한 해 넘게 견딘 직원이 열댓 명을 넘지 않을 정도로 고객의 폭언과 상사의 실적 압박이 일상으로 벌어진다. 소희는 현장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최저임금에 지나지 않은 급여를 받기로 하지만 실적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온전히 받지 못한다. 그나마 소희를 이해하고 도와주려했던 팀장이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그를 대신한 새로운 팀장은 잔인할 정도로 소희를 몰아세운다. 그 역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열악한 곳에 졸업반 학생을 밀어 넣는 교사, 현장실습생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어떻게 취급받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취업률에 목매고 있는 교육청. 소희의 자살 사건을 담당한 오유진 형사의 책임 추궁에 그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학생을 위한 길이었다고 항변한다. 자기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자기들 역시 피해자라고 입을 모은다. 취업률에서 낮은 평가를 받으면 교육부 지원금이 줄어들고 그러면 관내 몇몇 학교는 당장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는 교육청. 현장실습생 평가를 나쁘게 받으면 그 다음 학생들에게 취업기회가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닐까, 취업률이 낮으면 지원하는 학생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 하는 학교.


오유진 형사는 단순 자살사건으로 덮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문제를 찾기 위해 관련된 모든 것을 뒤쫓아 다닌다. 그 모습을 쓸데없이 들쑤시고 다닌다고 말하는 유진의 상사. 유진 덕분에 문제의 실체는 드러났지만 유진은 그 어느 것도 바로 잡지 못한다.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저지른 살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진의 상관이 했던 막말처럼 유진의 처절한 노력은 그저 쓸데없이 들쑤시고 다녀서 일으킨 평지풍파에 지나지 않았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헤집어놓은 채로.


영화 줄거리를 공개하는 것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나 영화 제작자에게 결례가 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공개해서는 안 될 줄거리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 줄거리라고 해봐야 2017년 1월에 전주에서 대기업 통신회사의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고등학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각색한 것이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줄거리가 아니라 김소희의 죽음을 따라가는 오유진 형사의 시선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것은 설명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로 인해 콜센터의 극심한 감정노동 실태와 열악한 업무환경이 드러났고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다른 수많은 일터에서 또 다른 어린 이름들을 만나야 했으니 말이다.


절반은 궁금증으로 절반은 의무감으로 이 영화를 본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온전히 의무감 때문이었다. 이런 그늘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 뭐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을 전공한 이가 콜센터 상담사를 수 년 간 추적 조사해서 펴낸 <사람입니다, 고객님>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그들이 겪는 감정노동이 그들의 건강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만드는지 읽으면서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지난 수 년 간 소송을 끌어오면서 내가 겪었던 고통은 좀 더 나은 삶, 좀 더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한 불편함에 지나지 않았고,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 앞에서 그것을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가난을 몸으로 겪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고, 막연하지만 좀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고, 그런 경우가 주변에 널렸었다. 지금은 우리 자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하다. 그러나 모두가 풍족한 것도 아니고, 개천에서 결코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무엇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영화에서 소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그것과 다를까?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다 올라가도록 관객 모두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막조차 끝나고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나서야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영화를 봐오는 동안 여태 그런 모습은 없었다.


영화가 다 끝나도록 왜 제목이 ‘다음 소희’인지 알지 못했다. ‘다음’이 뭘 뜻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찾아보니 누가 ‘다음’에 소희와 같은 희생자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단다. 끔찍한 일이다. 2017년 사건이 일어나고 고쳐졌더라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인데. 앞으로 이런 영화가 다시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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