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by 박인식

행함으로 (2016.12.01)


기도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때로는 깨달은 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드물게는 그대로 실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결심만 하거나 깨닫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오늘 실천한 것을 찾기 어렵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행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게 하라 하셨는데, 부끄러운 일이다.



아내의 외출 (2016.12.03)


두 주일 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첫 주에는 출장이 있어서 한 주만 버티면 되었다. 준비해놓은 반찬에 밥만 하면 되고, 특별히 어지를 일도 없으니 청소도 두어 번이면 되는 일이었다. 해놓은 반찬에 밥만 지어 먹었는데도 내내 속이 더부룩했다. 예전부터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걸 끔찍이 싫어해서 집에 불이란 불은 모두 켜놓고 출근을 했지만, 퇴근해 열쇠로 문 열고 들어오는 일은 끝내 적응이 안 됐다. 잠은 왜 그렇게 안 드는지. 잠이라도 푹 자자고 주말에 자정을 한참 넘기도록 버텨봤지만, 다음날 오히려 일찍 눈이 떠졌다.


새벽에 공항에서 아내를 맞아왔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데, 정작 공항에서 만나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살갑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데면데면 아내 곁에 서 있기만 했다. 결국은 애써 가져온 짐 푸느라 바쁜 아내를 나 몰라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모처럼 점심때가 지나도록 숙면할 수 있었다.


어제 교회에서 교우 한 분이 아내 없이 지내기 어떠냐고 묻기에 아내가 나 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말해놓고 나니 민망하더라, 내 욕심만 차린 것 같아서.



산티아고 가는 길 (2016.12.03)


여행 준비를 비교적 꼼꼼하게 하는 편이다. 단체 여행은 좋아하지도 않고 가본 일도 없어 매번 일정이며 숙소를 스스로 잡는다. 두루 살펴 계획을 세우는 까닭에 여행하는 동안 계획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꾸는 일도 없다. 계획한 대로 지내다 오니 여행이 효율적이기는 했을 텐데, 그런 까닭으로 계획한 것 이상을 누려보지 못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정보를 찾아보고 있다. 휴가 때 서영은 선생의 산티아고 여행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를 샀다. 저자는 산티아고는 죽을 만큼 고독할 때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계획을 잘 세워서 도전해야할 여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려 40일 가까이 걸어야 하는 길이니 어느 여행보다 준비를 많이 해야 할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계획을 잘 세워 여행을 효율적으로 마칠 생각보다는 저자처럼 ‘노란 화살표’ 끝에서 만날 그분을, 여행길에서 여러 상황을 통해 그분께서 깨닫게 하실 그 말씀을 기대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40일을 걷는 일이, 손톱깎이 하나라도 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드는 배낭의 무게도, 빗속을 걷고 변변치 않은 숙소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는 일도 어디 하나 만만할 게 있을까. 그래서 덜 고달플 수 있는 방법도, 짐을 최소한으로 꾸리는 요령도, 좋은 숙소를 챙기는 것도 필요하기는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절대 고독해지는 준비가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을 만나자고 나선 길에 정작 그분은 만나지 못한 채 그 먼 길을 잘 걸어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산티아고 가는 길 (2016.12.03)


젊은 날 출장을 밥 먹듯 다녔다. 출장비는 한정되어 있으니 먹는 것이며 자는 것이 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잘 먹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편하게 자자는 사람도 있고, 대충 먹고 자더라도 모처럼 집에 갈 걱정하지 않고 한 잔 기울이자는 사람도 있다. 난 늘 편한 곳에서 자고 싶어 했다. 먹는 건 대충 때우더라도 깔끔하고 쾌적한 곳에서 자야 다음날 편안히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산티아고 길에는 알베르게라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있다. 비록 낯선 이들이지만 한 여정을 가지고 한 공간에서 지내는 일이 낭만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행기를 읽다보니 낭만이 낙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난감하기는 하겠다. 본래 여행기는 난감한 일조차 아름답게 쓰는 것인데 언뜻언뜻 행간에 불편함이 비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걷는 것이야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잠자리가 복병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아! 숙소를 일컫는 ‘잠-자리’의 ‘잠-’은 장음이고 가을의 전령 ‘잠자리’의 ‘잠’은 단음.



산티아고 가는 길 (2016.12.05)


서영은 선생은 40여일을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산티아고는 그에게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이라고 했다. 걷는 동안 네 번이나 성령께서 만져주시는 것을 경험했단다. 이제 산티아고를 가야할 이유가 또렷해졌다.



염려 (2016.12.10)


염려는 구름과 같아서, 하잘 것 없는 구름이 햇빛을 가리듯 작은 염려조차도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 어제도 내 삶을 인도하시고 오늘도 인도하신다면 내일도 인도하실 건 너무도 분명한데, 매번 작은 염려에 얽매어 무시로 하나님을 잊는다. 구름으로 덮였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것이 아니듯 염려에 짓눌린다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닐 텐데,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염려 때문에 매번 낙심하고 사는지. 낙심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니, 어쩌면 내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내 안위를 포기하기 못해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되었건 불신앙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맑은 영혼 (2016.12.10)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느 순간 잊었던 기억이 오늘 아침 문득 떠올랐다.


환갑을 맞고 나서부터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애써 살아온 모든 시간이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느 한 순간에 닥치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몸이 극심하게 아프면, 그것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으면? 그때 추해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지런히 건강을 돌보고 지키는데 힘쓰고 있다. 병 때문에 아프지 않도록, 어쩔 수 없다면 그걸 이겨낼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말이다.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애쓸 뿐 아니라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한 애쓰고 있다. 열심히 묵상하고,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고, 글을 쓴다. 치매라는 것이 예방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애쓰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도 내 힘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니 하나님의 자비에 기댈 뿐이다.


이렇게 애쓰다 보면 삶을 마감할 때까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오래 전 꿈꾸었던 어니스트와 같은 맑은 영혼을 지닌 모습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기도 (2016.12.12)


나는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뢰고 무엇인가 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그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물음에 즉각적이고도 선명하게 대답하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평생 다섯 손가락 꼽기도 바쁘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려면 머리를 비우고 생각에 집중해야 하는데, 집에 돌아가야 하고 출근을 준비해야할 한정된 시간에 온전히 하나님 뜻에 집중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설 때면 흡족한 마음보다는 그저 오늘도 빼먹지 않았다는 작은 위안이 남을 뿐이다. 며칠 전부터 집에서 기도하고 있다. 하루 이틀 애를 먹기는 했는데 곧 기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이전보다 수월하게 몰입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묵상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것도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유익이 있는데도 굳이 새벽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닐까. 신앙은 함께 있을 때 자라는 법이다. 함께 하면서 게을러질 때나 낙심될 때 서로를 격려하며 고비를 넘어가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유익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겠다. 당분간 이대로 해보기는 하되 이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도 함께 살펴야겠다.



성경 읽기 (2016.12.18)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그러라고 하시니 그렇게 살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살지도 못했다. 오늘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라”는 말씀을 읽었다. 수없이 읽었을 말씀인데 아주 낯설었다. 왜 매사를 주께 하듯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미련하게 걸어왔다. 이 말씀을 진작 깨달았으면 좀 덜 힘들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눈길이 머문다고 모두 성경을 읽는 건 아닌 모양이다. 눈길이 지나쳐 가도 그런 말씀이 있는지 기억조차 못하니 말이다.



감사 (2016.12.20)


감사하지 않는 것이 말세의 징조 중 하나란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그만큼 위중한 문제로구나. 어제도 지켜주시고 오늘도 지켜주시니 내일도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염려를 덜 수 있었는데, 정작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잊었다. 묵상 중에 깨닫게 하시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닌가.



전화위복 (2016.12.21)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화가 변해서 복이 되는 것이지 복을 얻기 위해 화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흔히 우리를 단련시키시기 위해, 우리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단련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에는 다 뜻이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에는 늘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런 설명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우리가 겪는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 보다는 내 욕심으로 자초했거나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가 자초한 고통조차도 궁극에는 복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눈 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내외분께서 오랜 시간 이곳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위로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신원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곳을 떠나신지 벌써 두 해가 가까워 옵니다. 두 분이 살던 집 앞을 지날 때면 고통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이웃으로 좋은 교우로 지내던 시간이 떠오르곤 합니다. 집사님께서 이곳에서 당한 고통 때문에 오히려 은퇴를 늦출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결과를 허락하시기 위해 그 고통을 당하게 하셨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욕심 때문에 생긴 고통조차도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밀어 넣기를 즐겨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집사님 내외분께서 이곳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동안, 그리고 이곳을 떠나고 두 해가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두 분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선한 손길로 두 분을 인도하시는 것을 지켜보며 두 분에 대한 기도를 내려놓으려 합니다. 내년에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 몇 분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물론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기는 해도 때때로 두 분을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두 분을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두 분을 인도하신 손길을 지켜볼 수 있어 오히려 저희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자청하신 예수님 오심을 기리는 성탄절을 앞둔 아침에.



산티아고 가는 길 (2016.12.25)


산티아고 순례길이 상당히 여러 갈래가 있고 그러다 보니 거리도 조건도 천차만별인 모양이다. 산티아고 자체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한 달 넘는 시간을 일상으로부터 떠나 오로지 걷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고, 걷는 동안 깊은 묵상 가운데 내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기회가 될 수 있으며, 허락하신다면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뿐이다. 그러니 산티아고 순례에서 고려할 사항은 그저 철저히 고독해지는 것, 그것 하나 뿐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도중에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자니 내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코스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나. 다녀온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는 하겠지만, 일단 순례객이 가장 많이 찾는 프랑스길(Camino Frances)을 걷는 것으로 하고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800km라고 한다. 하루에 30km를 걷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걸어도 한 달. 완주가 목표이니 가다 힘들면 쉬어가기로 하고 하루 목표를 20km로 잡자. 그렇게 걸으면 사십 여일. 쉬는 날을 감안하면 하루에 25km는 걸어야 하니 적어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체력을 길러야겠다. 떠나기 전에 전체 800km를 열 번 정도는 걸어보리라. 한 달에 20일, 하루 10km씩 걸으면 넉 달에 한 번 걷는 셈이겠다. 그러면 대충 4년. 좋다. 한 번 해보자.


어제부터 하루 10km, 한 달에 20일을 걷기로 했다. 단지 스무 바퀴, 1시간 40분. 어제 걷고 오늘 걷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걸어보니 탄력이 붙더라. 신발이며 양말을 신경 써서 골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출장으로 밤늦게 돌아와 하루를 건너뛰고 모래 다시 걷자. 퇴근하고 거의 매일 1시간 40분을 걷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이요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기도 (2016.12.27)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나 스스로를 하나님 뜻에 복종시켜가는 과정일 것인데, 하나님 뜻에는 아랑곳없이 내 필요만 되뇌고 있는 것을 기도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가? 기도하는 중에 온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이 투영된 허상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재명 (2016.12.27)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이재명이 그렇다.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다 후회한 일도 있다. 노무현이 그렇다.


1988년 일이다. 5공 청문회로 이미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동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지원하러 와서 내가 묵던 여관에 묵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지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함께 묵었던 다른 국회의원들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과 달리 일하는 아주머니를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청문회에서 치밀한 논리와 정의감으로 활약하던 모습과 푸석푸석한 얼굴로 허름한 점퍼를 걸치고 일하는 아주머니를 따뜻하게 대하던 모습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렸다. 그런 좋은 기억이 있었는데도 언제부턴가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고 싫어하게 된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그에 대한 반감이 가시지 않았다. 나라가 뒤숭숭해지고 나서 그가 생전에 추구했던 바에 관심이 끌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야 책임감이며 역량이 그만한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토록 미워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이재명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싫어한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려고 사사건건 정부와 맞서려 했던 그가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는 게 고깝게 느껴졌다. 문득 까닭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는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재명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한다. 느낌으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정책과 역량에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시간 낭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례비 (2016.12.29)


목회자의 임금을 사례비라고 한다. 목회자가 하는 일이 여느 사람들이 직장에서 하는 일과 같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목회하는 일과 생업으로 하는 일이 다를까?


나는 만인제사장설을 신앙의 기조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성소요 그 직업이 성직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목회자가 받는 임금을 직장인이 받는 임금과 달리 사례비라고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목회자가 사례비라고 주장한다면 자기가 감당하는 일만 성직이고 여느 사람이 감당하는 일은 성직일 수 없다는 오만함에서, 교인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자기 직업을 성직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는 책임회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박상훈 (2016.12.30)


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의 대표인 박상훈은 보기 드문 정당정치학자이다. 그는 연이어 펴내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일관되게 정당정치의 의미와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특히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광장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요즘에 용감하게도 광장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기대인지를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일반 대중은 자기 욕구를 논리적으로 주장하거나 자기와 다른 주장에 대해 비판할만한 전문성도 없고 그에 매달릴 여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반대중의 욕구를 조직화하여 관철시킬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정당이라는 것이다.


탄핵으로 대선이 조기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전처럼 진영논리에 빠져 선거하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조금은 객관적인 눈으로 살펴보려 하고 있다. 문제는 누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그 주장이 의도하는 게 뭔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건강한 정당이 왜 필요한지 비로소 알겠다. 그의 주장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봐야겠다.



송년 (2016.12.31)


한 해의 끝 날에 서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함보다는 민망함과 송구함이 앞선다. 허락하신 생업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는데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사니 왜 그렇지 않겠나.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가? 내가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닐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시니 마지막 기회인 줄 알고 전심을 다해보리라. 이미 뿌리고 가꾼 것보다 더 누리게 하셨는데 여기서 누리게 하신 것을 거두어 가신다고 섭섭하다 할 수 있겠나. 다만 뜻이 있어 이곳에 보내셨는데 내가 힘을 다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면 훗날 무슨 얼굴로 주를 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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