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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8. 2023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사회평론

2022년 10월 31일


은퇴하고 나서 오히려 일할 때보다 더 바쁘게 지낸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남 이야기가 아니다 할 정도이다. 그 대부분이 책 읽고 글 쓰는 일이다. 평생 설계보고서 쓰고 살았으니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익숙하기 때문일 테지만, 소셜미디어가 있어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까닭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는 것은 모르던 것을 알아가고,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얻고, 때로는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그런 책을 읽는 것 자체야 힘들 게 없다. 그저 아무 곳에서나 펼쳐놓고 읽으면 되는 일이다. 어지간한 책은 도서관에 다 있고 없는 책은 신청도 받아주니 돈 들 일도 없다. 하지만 글을 쓰는 건 이와는 달리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책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쓸지 의식하고 읽어야 하고, 중요한 부분은 메모하고, 책상 앞에 앉아서 몇 시간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달리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그것만큼 시간을 보내기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경향신문에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을 발표해 일약 칼럼계의 아이돌로 등극한 이 책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사람이 글을 써서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훗날 누군가 자기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게 마련이며,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읽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글을 쓸 이유는 널렸다고 말한다.


“불멸을 원하지 않아도, 상상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지 않아도 글을 쓸 이유는 있다. 이윤주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엄습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 글을 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쓰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달구어졌던 편도체는 식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진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생각할 거리는 안겨주는 책을 읽는 것도 삶을 되돌아보고 또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궁리하게 만들기 때문에 읽는 보람이 크다. 그러다 보니 다른 책에 비해 읽고 리뷰 쓰는 데 시간이 두 배는 걸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생에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자식과 늙어간다는 것과 좌절에 대한 그의 통찰은 아직 환갑에도 미치지 못한 그의 나이를 잊게 만든다.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철학자이지만 그의 글에는 깊이와 아울러 촌철살인의 위트가 넘친다.


저자는 그의 존재를 알린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서 추석 때 만난 집안 어른이 결혼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물을 때 “결혼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으로 과도한 관심을 물리치라고 조언한 바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통쾌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자리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아이는 고사하고 결혼 생각도 안중에 없는 자식들 때문에 애가 탈 지경이다. 저자는 부모에게 자식이란 ‘우연의 허망함’을 견디어 나가게 만드는 존재라고 말한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채 백 년도 못 되는 인생의 외로움과 덧없음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순간을 살다 가는 불나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에 자기 닮은 자식을 상상한다. 너는 내 자식이란다, 너와 나는 한 배를 탔단다, 정체성을 공유한단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란다. 미래의 자식을 상상하며 자신을 다음 세대로 연장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자식을 상상하며 오늘 하루도 힘을 내어 고된 삶을 견디어 나간다. 정기예금을 알아보고, 주식시장을 점검하고, 주택담보대출을 꼼꼼히 따져본다. 다음 세대와 무관하다면 차마 감당하지 않았을 노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에서 생겨나는 의미에 힘입어 우연의 허망함을 견디어 나간다.”


어딘가 아쉽다. 저자가 지닌 탁월한 통찰력이라면 자식의 의미를 이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인데. 하긴 나도 자식만 있을 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자식이 가정을 이루고 거기서 태어난 또 다른 생명을 만나게 되니 인생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더란 말이지. 저자가 그럴 나이쯤 되어 새롭게 자식에 대해 정의한 글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저자는 키케로의 말을 빌려 노인들에게는 노인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회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년에 회고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젊은 시절부터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하고, 공부에 습관을 들여야 하고,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신체 기능이 떨어지기는 했어도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는 되고,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습관을 들였으니 여기까지는 오케이. 거기에 더해 “노년에 쾌락에 빠지지 않으려면 젊은 시절에 놀만큼 놀아봐야 하고, 노년에 멋진 추억에 잠기려면 젊은 시절에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과연 멋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시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아쉬움 없이 살았으니 이것도 오케이. 그렇다면 이젠 회고의 즐거움을 누리고 살 일만 남은 것인가? 결국 과거를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닌가? 이것은 격려인가 저주인가?


나이가 들면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돌아가실 무렵 치매 조기 증상을 보였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던 내겐 그것이 막연한 것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두려움으로 남아있다. 치매는 예방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만, 열심히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그것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치매의 상태를 정의하고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은 아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는다.


“치매란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도 남들도 그 음악을 듣고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다. 치매를 겪으면서 자신이 치매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람직한가. 자신이 한 때 누리던 존엄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메타 의식은 상황의 개선에 공헌할 때나 유효하다. 자기 상황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개선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선으로도 이르지 못할 자의식을 갖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치매는 자의식마저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치매를 자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치매가 남은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크다. 그런데 치매를 자각할 수 있다면 본인이 모를 수 없는 일이고 자각할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다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좌절을 겪는다. 좌절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 위로가 오히려 좌절로 인한 고통을 더 키우기도 한다. 저자는 “사태를 다른 관점에서 보라고 권한다는 점에서 선의의 위로는 어느 정도 가스라이팅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친구가 좌절을 겪을 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위기가 곧 기회라고 격려할 수 있고, 시험에 낙방한 젊은이에게 입맛이 쓰겠지만 보약 먹은 셈 치라고 위로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묻는다. 낙방은 낙방, 실연은 실연, 패배는 패배인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좌절과 패배를 인정하라고, 그래야 그것을 이겨내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인지와 납득은 다르다. 낙방, 실연, 패배를 인지했다고 해서 곧바로 마음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선뜻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그 불편한 현실마저 수용해 냈을 때 그것이 바로 정신승리이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사상을 연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학자이다.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가 없을 수 없다. 이미 정치가 실종되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당연히 정치인다운 정치인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저자는 미숙한 정치인에 대해 질타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미숙하나마 정치인’이라고 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미숙함’에 대한 저자의 정의는 고려할만 하다.


“누가 미숙한 정치인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정치적 유아가 아닐 수 없다. 막대한 피해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저자는 최근 어느 시답잖은 정치인이 올린 “문제는 민주당다운 가치와 덕성의 복원이다. 빛나는 가치, 고결한 동지애, 그것부터 깃발로 다시 내걸어야 한다”는 글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한 때 영원하리라 믿었던 연인의 감정도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변색하는데 다수가 모인 정당의 가치가 변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갈등과 조정과 타협을 거치게 되어 있는 정치인들이 이른바 고결한 동지애를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까? 연대와 단결이 시간의 풍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려면 우선 시간의 풍화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세속의 정당이 의로운 위상을 지속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은 활력을 빼앗고 권태와 나태와 관성과 타락을 남겨준다. 그런 시간 속에서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에 정면 도전하는 비판적인 존재를 환영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듣기는 싫겠지. 정말 쓴 소리는.”


연목구어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무릎을 칠만큼 동의가 되는 글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 중 몇 구절.


“나는 블라우스가 정말 아름다운 옷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뜻 사서 입지는 않는다. 옷을 사 입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옷이 예쁘다고 해서 그 옷을 입은 자신이 예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옷을 사 입을 때는 단순히 예쁜 옷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야 한다.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꼭 자신이 화려해지지는 않는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은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기 때문이다.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정해진 목적은 없어도 단기적 목표는 있다. 산책에 목적은 없어도 동선과 좌표는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진리이지만 사람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의 상태를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람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으니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말씀이라는 역설적인 해석도 있다. 이 글이 마치 그와 같다. 낯선 이야기도 아니고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저자의 글이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때로 궤변도 있다. 궤변이라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이도 있기는 하겠지만. 예컨대,


“음식은 풍족한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이 음식을 가지고 싸우게 되면 깊은 자괴감이 든다. 식당에서도 고객이 마지막 한 점을 남길 수 있게 넉넉한 양을 제공하는 게 좋다. 그 한 점을 남김으로써 고객은 자신이 식탐의 노예가 아니라 자제력을 갖춘 어엿한 성인이라는 자존심을 얻게 된다. 음식을 적게 주면 그 소중한 자존심을 훼손하게 된다.”


나는 음식 남기는 것이 음식과 음식을 마련한 이의 수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가 불러도 음식이 남은 것을 참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먹고 나서 꼭 후회하지만 결코 먹성이 좋아서도 아니고 식탐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지나칠 만큼 예의바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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