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Apr 09. 2023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

해파랑길 도전기

조정선

수다

2021년 9월 11일


얼마 전 토요일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집 앞에 있는 안산자락길을 걸었다. 서울에 돌아오고 난 후 열 번 가까이 걸은 길인데, 그날처럼 사람이 붐비는 것은 보지 못했다. 봄꽃이 절정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걷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그 문화를 뒷받침할 만큼 산책로가 정비된 것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내친 김에 동해에 걸으러 가자고 하니 친구 하나가 반색을 한다. 친구 두 명을 더 모아서 넷이 떠나기로 했다. 가서 어디 걸을 거냐고 물으니 영랑호 둘레를 걷는 것도 좋고 해파랑길도 괜찮을 거란다. 그렇지 않아도 제주올레길이며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관심이 동했다.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따라 휴전선까지 가는 길인데, 일단 속초쯤에서 시작해보자고 했다. 그런 생각을 올리니 신경아 선생께서 해를 등지고 걸어야 하니 남쪽에서 북쪽으로 걷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남기시고, 박정욱 피디께서는 선배이신 조정선 피디께서 은퇴한 후 해파랑길을 걷고 책을 내셨다며 이 책 읽기를 권하셨다.


사실 사우디에 사는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어 자료도 모으고 오 년 넘게 하루걸러 10킬로미터씩 걷는 연습을 했다. 짧아도 사십 여일은 잡아야 하니 은퇴해야 가능한 일이어서 미뤄두었다. 정작 서울로 돌아오니 산티아고가 너무 먼 곳이 되었고, 무릎 관절이 예전만 못해서 언덕 걷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거기에 적지 않은 짐까지 지고 걷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루기 어려운 꿈이 되겠다 싶어 대신 해안을 따라 걷는 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자도 출발은 나와 같았다. 한 달 넘게 시간을 내어야 하니 안식년에 떠나려 했다가 그만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더란다. 그래서 은퇴하고 친구와 둘이서 제주올레길을 걸을까, 해안도로가 완성된 울릉도 해안을 걸을까 하다가 해파랑길을 걸었단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별게 아니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책을 읽어보면 산티아고에 오는 사람들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인생을 출발하기 전에 각오를 다지려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난관을 돌파할 힘을 얻으려는 중년도 있고,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하려는 마음으로 오는 노년도 있단다. 소설가 서영은 선생은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는데 무려 네 번이나 그런 체험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내가 산티아고를 꿈꾸었던 큰 이유였다. 네 번은 고사하고 단 한 번만이라도. 그래서 산티아고는 혼자 걷는 길이라고도 한다.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싫은 고통을 겪는 동안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한 일이 있다. 겪어보니 한 번이면 충분하더라. 그래서 굳이 산티아고에 갈 이유가 없어졌고, 이전만큼 산티아고에 목매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져서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을 여우의 신포도로 위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은퇴를 하고 이 길을 걸은 저자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이 책에서 해파랑길을 걸은 기록보다도 평생 피디로서 걸어온 삶을 회고하는데 더 무게를 실은 것으로 보인다. 나야 단지 해파랑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을 뿐이고.


저자의 글을 읽어가다 보면 해파랑길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만든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자리가 덜 잡힌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정비가 덜 되어 있고 시설도 엉성하다. 거리 표시가 실제와 맞지 않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이정표가 턱없이 부족해 잠깐 한눈팔았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안내 표지를 자주 놓치게 되고, 태풍으로 곳곳이 유실되고 끊겨있기도 하다. 안내판에는 그저 통행금지라는 단호한 문구만 눈에 띌 뿐 어디로 돌아가라는 안내도 없다. 방향 표지판까지 날아간 경우도 더러 있다.”


그동안 해안이나 하천을 따라 걷고 호수나 산 둘레를 걸으면서 나무 데크로 만든 길이 얼마나 훌륭한지 매번 감탄했다. 이 길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려니 했는데 영 그에 못 미치는 모양이다. 기대를 좀 낮추어야 하겠다.


나는 금 하나만 그으면 하늘과 바다가 나뉘는 동해바다라야 제대로 된 바다라고 여긴다. 그래서 동해안을 따라 뻗어 내려가는 7번국도 지나다니기를 매우 즐겨한다. 아버지 고향이 삼척이고, 첫 현장이 울진 원전이었던 데다가 지금까지도 같은 일로 그곳을 출입한다. 그래서 그 길은 눈감고도 훤하다. 그러고 보니 놀러간 곳도 대체로 경북 울진에서 강원도 고성 사이에 몰려있다.


동해안이 비교적 곧게 펴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굴곡이 없을 수 없어 그 해안을 따라가는 7번국도 역시 굴곡이 심했다. 당연히 속도를 내기 어렵고, 그래서 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는 울진이 부산 가기보다 오히려 더 멀다. 오래 전에 7번국도 개량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거의 끝이 났는지 예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선화가 되었다. 다니기는 편해졌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구간이 많아진데다가 길가에 방호벽까지 세워져 있어 예전의 7번국도가 주는 감흥과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해파랑길은 해안을 따라 갈 줄 알았다. 저자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바다가 보이기는커녕 바다에서 크게 벗어난 내륙 길이나 산길도 많고, 밭두렁 논두렁길에다가 번화가 한복판이나 뽀송뽀송한 산업도로까지 걸어야 했단다. 그러면서 해파랑길을 설계한 이가 필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다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 중 대표적인 코스인 프랑스길 800킬로미터에 맞추느라 길을 그렇게 늘렸다는 것이다. 사실 통일이 안 된 남한에서 그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루트는 없다. 그러니 내륙 쪽으로 길을 구불구불하니 늘여놓지 않았겠나. 게다가 전체 길이가 770킬로미터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길이를 다 더하면 741킬로미터 밖에 안 된다고 했다. 억지로 꿰어 맞췄다는 말이지. 아직 계산을 해보지 않았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도 언급했지만 동해안에는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시설이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남쪽부터 올라오면서 고리원전 월성원전에 울진원전까지. (그 모두 내가 밥 벌어먹고 살던 현장이다.) 울산에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동해시에 시멘트공장, 거기에 동해경비사령부 같은 군사시설도 적지 않다. 이래저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구간이 많겠다.


그래도 저자는 동해안은 공장지대를 빼놓고는 대부분 경치가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고 말한다. 다 아름답지만 그 중 특히 부산 오륙도 이기대 공원 해안산책로, 해동용궁사, 간절곶, 삼척 용화해변 말굽재, 강릉 경포대, 주문진 소돌항을 꼽는다. 나라면 그 중에 용화 언덕길을 꼽겠다. 울진원전 현장은 어려움이 참 많은 곳이었는데, 문제가 생겨 밤새 차를 달려 내려가다가도 이곳에만 서면 모든 걱정을 다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울산과 강릉 구간은 오르막이 심하고 높아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된단다.


해파랑길은 남해의 남파랑길, 서해의 서파랑길과 함께 한반도 해안을 감싸는 코리아 둘레길의 일부이다. 홈페이지에 가면 전 구간의 지도와 상태가 상세히 안내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곳에 언급된 난이도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대개 높낮이가 급격한 정도로 급수를 매기는데, 쉬운 코스로 되어 있는 평탄한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이 가장 안 좋았고, 오히려 바닥이 고르지 못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걷기에는 최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번에 걷기로 계획하는 가진항-설악항 구간이 쉬운 코스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이 말대로라면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이라는 게 아닌가. 난감하다. 그래도 일단 걸어보고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이 길을 걷는데 산티아고 순례길과 마찬가지로 각 구간에서 스탬프를 찍게 되어 있다. 주관단체인 ‘한국의 길과 문화’가 발행하는 여권에 스탬프를 하나씩 찍어나가면 된다. 책에서는 여권이 유료라고 되어있지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파일을 다운 받아 출력하면 된다. 스탬프는 해파랑길 종합안내판 기둥에 매달아놓기도 하고(결합형) 별도 지주를 세워 거기에 매달아놓기도 한다(지주형). 저자는 스탬프가 놓인 박스의 크기가 너무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아 번번이 헤매기도 했고, 어느 곳은 잉크가 말라 있어 희미하게 찍히거나 아예 문양이 나오지 않기도 했단다. 책이 출간 되고 한 해 반이 훌쩍 넘었으니 좀 나아졌을지, 아니면 오히려 전만 못할지. 조금씩 기대가 낮아진다.


저자는 트레킹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가 오버페이스 하다가 숙소를 못 찾아 애먼 곳을 하염없이 걷게 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이겠다. 둘이 걸으면 반드시 갈라지고 셋이면 하나를 왕따 시키는 일이 벌어진다고도 말한다. 그 길을 한 번에 걸으려니 짐이 적지 않을 텐데, 잔뜩 싸온 것 중에 없어도 될 것이 꼭 있어야 할 것보다 더 많더란다. 그래서 두 번이나 택배 편에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가 짐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10킬로그램 안쪽으로 꾸려야 한다는데,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배낭이 죄다 그것 두 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어느 여행 가이드는 달랑 어깨에 멘 가방 하나로 완주했다고도 하더라. 시험 삼아 같은 무게를 메고 걸어보니 최소한의 짐조차 메고 그 먼 길을 가는 게 영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파랑길은 동네를 지나가니 필요할 때 사서 쓰면 되는 일이고. 그곳과는 사뭇 다른 조건이겠다.


저자가 실제로 걸어보니 트레킹에는 여분의 속옷 한 벌씩과 방한용 조끼 하나, 예비 양말 한 켤레로 족하다고 한다. 바지나 셔츠는 숙소를 조금 일찍 잡은 날 빨아서 다음 날에 입으면 되지만 발가락 양말을 꼭 신고 다니라고 권한다. 며칠은 괜찮지만 이후에는 발가락끼리 서로 쓸려 난리 북새통이 된단다. 그렇게 해서 10킬로그램 이내로 무게를 줄였는데도 그 마저도 날이 갈수록 부담이 되더란다.


저자는 하루 평균 30킬로미터 2개 코스를 강행군했다. 그렇게 걸으니 엄청난 운동량에 체중이 줄 것도 같은데 실제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조금 늘었다는 기분도 들고. 그 정도 걷는데 몸에 별다른 무리가 오지도 않고, 확실히 몸이 매일 업데이트 되는 느낌이 들어 개운하고 상쾌하다고 했다.


사실 은퇴자에게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 고려사항이다. 저자는 해파랑길 여행자는 숙박비를 5천 원 깎아준다는 팁도 전한다. 그래서 둘이 다닌다면 1인당 하루 4~5만 원이면 족할 것이라고 한다. 숙박비 2만 원, 식대 7~8천 원 정도. 음주파라면 술값을 별도로 잡아야겠지만 매일 30킬로미터씩 걷다 보니 술이 마냥 당기지는 않더란다. 해안 길을 걷다 보니 매번 먹게 되는 음식이 회와 매운탕뿐이라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생선은 냄새도 맡기 싫어졌다고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회와 매운탕이 싫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반주를 곁들이면서. 싫어진 게 아니라 값이 부담스러웠던 게 아닌가 모르겠다. 트레킹 중에 모두 11가지 지역 특산 막걸리를 마셨다는데, 막걸리가 될지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특산물 하나를 택해 곳곳마가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도전이 되겠다.


저자는 부산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 휴전선까지 740여 킬로미터 구간을 27일 만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짐도 문제였을 것이고 숙소도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사흘 동안 몇 구간을 걸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한 번에 삼사일 씩, 한 해 서너 번 걸어서 삼사 년 안에 마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루 30킬로미터도 너무 멀지 싶고. 이번에는 일단 차를 가지고 가니 한 곳에 세워놓고 걸어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자 세운 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했다. 기왕이면 매 구간 기록도 남기고.


기록을 남긴다고 해서 책을 낸다는 말은 아니다. 책을 개나 소나 낼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저 어느 곳이 되었던 적당한 곳에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올려놓는 정도면 족하겠다. 물론 내일부터 사흘 동안 생각했던 만큼 걸었을 때 이야기이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된다는데, 사흘 계획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올까 슬며시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파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