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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45구간; 장사항-설악항

2023.04.12

by 박인식

저녁밥 먹을 때 반주를 마다던 녀석이 잘 시간이 되니 주섬주섬 술판을 벌인다. 그러면서 미세먼지가 매우 나쁘다는 예보가 나왔다며 내일 못 걷겠단다. 어련하시겠어. 뭐 큰 기대도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강릉 산불은 진화가 되었다. 여기서 강릉이 어딘데 괜찮냐는 전화에, 문자까지 받았다. 염려해준 것은 고마우나 지리공부는 좀 하셔야 할 듯.


아침나절에 영랑호 한 바퀴 돌고 체크아웃하기로 해서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나섰다. 어제 친구가 범바위는 꼭 보라고 댓글을 달았다. 범바위를 찾아 그 위에 있는 영랑정에 올라가는데 커다란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난간을 부수고 쓰러져있다. 어제 강풍에 영랑호에 파도가 사납게 치더니 범바위 뿐 아니라 사방에 부러진 가지가 널렸다. 호수에 파도치는 걸 보는 게 쉽지 않은데, 영상 하나 남겨놓을 걸.


부지런히 영랑호를 도는데 똑같은 모양의 독립가옥 수십 채가 폐가가 되어 서있다. 일련번호가 붙은 걸 보니 콘도였던 모양이다. 어느 집엔가 산불화재로 소실된 건물이니 안전을 위해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그러고 보니 뒷산에 자그마한 나무가 드문드문 서있을 뿐 전체가 휑하다. 하긴 속초 산불이 엄청났었지. 아마 그 기억 때문에 강릉에 산불 났다는데 속초에 있는 우리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니 지리공부 좀 하라는 같잖은 투정은 잊어주시라.


체크아웃 하고 친구들은 속초중앙시장으로, 나는 다시 걷기 시작. 속초부터 외옹치 지나 대포항에 이르기까지 해안이 펜션으로 가득하다. 대포항에는 라마다호텔이 거대한 성벽이 되어 바다를 가로막고 서있다. 그 옆에는 그거 세 배나 되는 반얀트리호텔이 건설 중이고. 바다 조망은 고사하고 숨이 턱턱 막힌다. 국가시설이 해안을 독차지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어떻게 상업시설이 해안을 독점하게 허가를 내줄 수 있는지 의아하다.


오십 년쯤 전에 이곳에 놀러왔다가 대포라는 이름을 듣고 한참 웃었다. 삼십 년쯤 전에 교회 식구들과 놀러왔을 때 대포항은 싱싱한 생선을 값싸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대포항 앞 매립지에 헌다한 도시가 들어섰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어딜 가도 넉넉한 인심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구나. 아, 옛날이여...


이번 구간엔 표지판이 단 하나가 안 보인다고 막 욕을 하려는 참에 7번국도와 마주치는 곳에 자전거길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래도 욕은 마저 뱉어야겠다. 이래 놓고 해파랑길은 무슨 개뼈다귀 삶아먹을 소리냐.


설악항에서 친구들을 만나 순대국 먹으러 아바이마을로. 싫다는 혜인 아범 끌고 굳이 그곳에 순대국 먹으러 갈만큼 맛있는 집이었는데, 음식 맛이 달라진 건지 내 입맛이 달라진 건지. 이제는 감격도 감동도 없는, 그저 모든 게 밋밋한 나이가 되었다.


아무튼 홀로 고군분투 끝에 목표했던 해파랑길 45구간, 46구간, 47구간 42.3킬로미터 걷기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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