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3.05.02 (화)

by 박인식

엘츠성 안을 둘러보다가 어느 방에 가니 그곳에 살던 역대 영주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따라가는데 마지막 초상화가 눈길을 붙들었다. 수트에 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그 아래에는 요즘 가족사진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대단한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짐작할 만한 특별한 것 없는 사진이어서 더 인상 깊었다.


영주의 거처는 꼬불꼬불한 복도를 지나고 방 몇 개를 거쳐야 다다르는 성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그곳까지 침입하는 게 쉽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었다. 침실을 중심으로 세면실과 화장실, 거실, 서재와 예배실이 둘러싸고 있었고 벽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전체를 카펫으로 둘렀다.


예배실에 놓여있는 골고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두 강도 조각상이 예술품으로도 가치가 높아 보였지만 아쉽게도 촬영을 금지해서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검색으로 예배실 사진을 찾기는 했는데 정작 그 조각상은 작아서 알아보기도 어렵다. 아무튼 침실 가까이에 예배실을 둔 것은 영주의 신앙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성을 높이 짓기 위한 면죄부였단다. 성을 교회보다 높게 지르면 신성모독으로 처벌 받았는데, 그를 면하기 위해 성 안에 예배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씻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세면실을 보면서 그 높은 곳까지 씻을 물을 들어 올리는 게 얼마나 고달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씻고 난 물이나 용변 본 것을 가지고 내려가는 일은 또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싶기도 했고. 그를 위해 수고했어야 할 그 누군가가 말이다.


혜인 아범이 일하는 비스바덴 극장은 귀족들의 후원이 전체 후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더구나 비스바덴이 온천 휴양도시이다 보니 부유한 귀족이 많이 살고, 그래서 다른 극장보다 재정이 탄탄하다. 물론 일반인 후원도 적지 않고 극장에서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그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귀족 후원자들은 그들이 자기 성으로 극장 관계자들을 초대한다. 혜인 아범이 그런 경험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집을 떠나있던 자녀들이 돌아와 초대된 손님들을 맞더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귀족들이 자녀들에게 자기들과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지 가르친다는 것이고.


물론 후원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예술가들을 후원해 예술을 성숙시키는 것이 자기들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정작 자기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외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수고를 딛고 그들이 향유하는 그들만의 삶을 어느 정도 인정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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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jpg <예배실, 예수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상은 뛰어난 작품으로 보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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