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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08. 2023

안나 네트렙코와 함께 출연한 <나부코>

이십 년 광팬으로 지내다 오늘 비스바덴 오페라 극장에서 드디어 별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가 생생한 육성으로,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끊어질 듯 말 듯 부르는 아리아를 들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아리아 <언젠가는 나도 떳떳한 몸이 되리라 Anch'io dischiuso un giorno>.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음에 폭포같이 좌중을 압도하는 성량이 아니라 지극히 절제된 소리로 애끓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절창이었습니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싶었습니다.     


아리아 하나 끝날 때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연주를 멈춰야 하기를 수차례. 박수가 멈출 기색이 없어 그가 손을 저어 만류해야 겨우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의례적인 기립박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 속에 제가 서 있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감격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박수를 받는데 제 자식이 함께 해서 더욱 감격스러웠지요.     


자식이 1997년 성악을 시작했으니 올해가 26년째입니다. 공익근무 훈련 받느라 두 달 빠진 것 말고는 지금껏 쉼 없이 노래해왔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르는 노래를 편안한 마음으로 듣기 시작한 것을 불과 몇 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의 음악을 평가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짝이 없는 관객이기도 했습니다. 자식은 연주가 끝나고 나면 늘 아내에게 제 반응을 묻곤 했지요. 일부러 인색하게 굴 일이야 있었겠습니까. 부모 눈에는 자식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만 보여서 그렇지요.     


연주를 앞두고 자식이 이번처럼 긴장하는 모습은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베이스에게는 <나부코>의 ‘자카리아’ 역이 가장 넘기 힘든 산이라고 하더군요. <나부코>가 ‘나부코’와 ‘아비가일’과 ‘자카리아’ 세 사람이 끌어간다고 할 정도로 비중이 큰 역할이기도 하고, 서곡이 끝나고 등장해 극 초반부를 이끌어 가는데 지금껏 넘어보지 못했던 고음을 뚫어야 하는 아리아로 이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 전에 역할을 맡고나서 도중에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오늘 공연 마치고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긴장했느냐고 물으니 한 해를 쏟아 부었는데도 고음이 해결되지가 않더랍니다. 그러다 기적처럼 최종 리허설 전날 해결이 됐다네요.     


음악을 좋아해서 학교 다닐 때부터 음반을 모았고 늘 그것을 틀어놓고 살았습니다. 자식을 갓 낳았을 때 집안일 하는데 아이가 칭얼대면 아내는 아이 귀에 헤드폰을 씌워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묘하게도 잠잠해졌거든요. 그때 모아놓은 음반이 자식의 교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제 취미가 자식의 진로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다 보니 자식이 제 취향을 잘 알고 또 닮아가기도 했지요. 그러니 제가 안나 네트렙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안나에게 부탁을 한 모양입니다. “우리 부모님께서 당신 공연을 보러 멀리 서울에서 오셨다. 함께 있는 사진이 우리 부모님께 큰 선물이 될 것이니 잠깐 사진 찍을 틈만 좀 내다오.” 뭐 이랬답니다.     


다 끝나고 무대 뒤로 가서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공연 보러 한국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 이러더군요. 감격스러웠습니다. 물론 별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래도 자식 부탁을 잊지 않은 걸 보면 자식이 동료로서 인정을 받았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길게 이야기 나누지는 못하고 그저 사진 한 장 찍고 덕담 나누고 끝났습니다.     


팔불출 같은 소리이지만 오늘 혜인 아범 공연은 한 마디로 “작두 탔습니다.” 더 설명할 말이 없네요. 한 해 동안 엄청 고생했다는데,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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