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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27. 2023

안나 네트렙코 Anna Netrebko

매년 아이들 보러 다녀가지만 이번에는 몇 달 만에 다시 독일을 찾았습니다. 혜인 아범이 비스바덴 극장의 5월 오페라 축제 때 출연하는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때문이지요. 혜인 아범이 유럽 오페라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서 반드시 챙겨 보리라 마음먹은 작품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품 때문이 아니라 함께 출연하는 성악가 때문에 보러 온 겁니다. 세계 정상의 성악가들조차 최정상으로 여기는 ‘안나 네트렙코’가 비스바덴 극장에서 <나부코>의 아비가일 역으로 롤 데뷔 무대를 갖습니다.


‘안나 네트렙코’의 음반을 챙겨듣기 시작한 게 족히 이십 년은 넘었지 싶습니다. 1971년생이니 올해 쉰둘인데, 그의 공연을 처음 본 게 서른이 되기 전이었거든요. 그는 어느 날 세계 오페라 계를 흔들어놓으며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공연영상은 DVD 뿐이었으니 지금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제가 구한 공연영상이 열편이 넘으니 제가 그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처음 그의 공연을 본 순간에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이번 세대의 마리아 칼라스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노래도 노래지만 춤도 아주 빼어납니다. 노래 부르는 중간에 아주 격렬한 춤을 추며 무대를 뛰어 다니다가 숨 한 번 고르고 바로 노래를 이어가는 대단한 실력자였습니다. 지금이야 예전만 못하지만 미모로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았지요. 언젠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영상을 본 일이 있는데, 무대의상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뇌리에 강렬하게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공연영상 중에 <The Voice>라는 게 있습니다. 대표적인 아리아 몇 곡과 아울러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는데요, 그 영상을 보면서 그의 기량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어렸을 때 서커스 훈련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어떤 자세로든 노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무대에 누워 머리를 객석 쪽으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완벽하게 노래를 소화해 내는 영상도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학교에 다녔고, 마린스키 극장에 발탁되어 그곳에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로를 만나 <피가로의 결혼> 수산나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24세가 되던 1995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로 미국 무대에 데뷔했는데, 이 공연의 성공으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자주 초대되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이후 벨칸토 창법으로 전환해 베르디의 <리골레토>, 푸치니의 <라보엠>, 벨리니의 <청교도>로 레퍼토리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2002년 <전쟁과 평화>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습니다. 제가 그를 알게 된 게 아마 이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어서 2003년 뮌헨에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로스엔젤레스 오페라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런던 로열오페라에서 <돈조반니>에 출연했습니다. 그는 2008년 10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출연할 계획이었지만 임신 때문에 독일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로 교체된 일이 있습니다. 디아나 담라우는 지금 독일을 대표하는 소프라노가 되었지요.


그는 러시아 태생이지만 2006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해 빈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주하는데 러시아 국민이다 보니 비자 얻는데 제약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 과정에서 모욕도 많아 당했다는군요. 그렇기는 했어도 러시아 집권층과 연계되어 있다는 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2년 러시아 대선을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복귀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한 500명 중에 들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지요.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이틀 뒤인 2022년 2월 26일에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며 전쟁에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그 성명을 지켜보면서 서방 오페라계를 설득하기엔 부족하겠다 싶었습니다. 당시 서방에서는 푸틴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성명은 압력을 의식해 마지못해 서방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준이었거든요. 2022년 3월에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의 감독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연 계약을 취소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베를린 국립오페라단도 푸치니의 <투란도트> 공연을 취소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푸틴과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투란도트>에 안나 대신 우크라이나 출신 가수를 출연시켰습니다.


공연이 연이어 취소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2022년 3월 30일 변호사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명시적으로 규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데미 오페라극장에서 연주를 취소했습니다. 고국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말입니다. 정치인도 아닌데 애매하게 희생되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그의 행보를 보면 서방의 그런 조치를 탓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혜인 아범(베이스 박영두)이 단원으로 있는 비스바덴 극장 2023년 5월 오페라 축제의 베르디의 <나부코>에 출연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이미 계약을 맺고 혜인 아범의 출연도 확정되었지만 독일의 반러시아 정서 때문에 발표하지 못하고 쉬쉬 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계약이 공개되면서 비스바덴 관객들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음악인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연일 신문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기사로 올랐고, 비스바덴 극장과 공연 계약을 맺었던 우크라이나 음악인들이 모두 공연을 취소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공연이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상태였습니다.


아무튼 공연은 계획대로 5월 5일과 7일 양일간 열리게 되었습니다. 내일과 모래 리허설이 있습니다. 안나 네트렙코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오늘 비스바덴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잘 알려진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는 바빌론 왕 나부코와 나부코의 수양딸이 아비가일, 그리고 스가랴 히브리 제사장 세 사람이 이끌어 갑니다. 혜인 아범도 이번에 자카리아(스가랴) 제사장 역으로 롤 데뷔하는 무대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첫 무대인데다가 상대역이 안나 네트렙코이니 왜 안 그렇겠습니까. 긴장되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안나 네트렙코라니요. 마음 같아서는 혜인 아범 덕분에 안나 네트렙코와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작품 해설은 댓글에 링크를 올려놓았습니다.


Anna Netrebko at a ceremony as Russia's People's Artist with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in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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