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온 신성한 존재와 신성한 존재가 된 인간
바트 어만
갈라파고스
강창헌 번역
오강남 해제
2015년 12월 7일
‘역사적 예수’라는 발칙한 주제에 관심을 가진지 삼 년이 넘었다. 그러던 중에 고통의 문제를 다룬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를 읽다가 저자인 바트 어만이 성서비평을 통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일가를 이룬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저술을 통해 성경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하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초기 기독교가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왜 그런 차이가 생겨났는지 하는 문제에 천착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내가 읽은 책들은 하나 같이 예수는 신성한 존재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신성한 존재가 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모두 성경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예수 생전에 제자들을 포함한 추종자들이 예수를 철저하게 인간으로 이해했다고 말한다. 교사, 랍비, 예언자, 또는 ‘메시아적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메시아를 신성한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인간’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명예를 부여하신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을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말이다. 저자는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를 명시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른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명료하게 선언하는 내용이 없고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면서 “공관복음은 ‘신성하게 된 인간’으로 표현했고 요한복음은 ‘인간이 된 신성한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으며 공관복음에 비해 신학적인 내용이 많이 추가되었다.) 저자는 예수가 정말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했다면 다른 복음서에서도 최소한 그 사실은 언급했어야 한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창조 이전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복음서의 이와 같은 연대기적 변화 양상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보여준다. 원래 예수는 부활해서야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공생애에 앞서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결국에는 온 생애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세상 오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했으며, 마침내 선재하시던 신성한 존재였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신성하게 된’ 존재인 예수가 ‘세상 오기 전부터 신성한’ 존재였던 것으로 여겨진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생전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부활 때문에 예수를 ‘신적인 메시아’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인간으로 생각했으며, 그래서 메시아가 죽고 난 후 부활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든, 환상이었든, 신념이었든)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회심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결국 예수를 신성한 존재로 만든 것은 예수의 메시지가 아니라 제자를 통해 퍼져 나간 부활신앙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부활신앙 위에 서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부활의 역사성은 부정한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부활신앙에 근거한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인데, 저자는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더 이상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하는 질문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하는 역사적 질문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의 이런저런 주장을 살필 때 그가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단편적인 주장이 아닌 일관된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저자는 그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는 나 역시 같은 상황이기는 하다. 나 스스로도 저자와 같은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신앙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 의아하다. 오랜 묵상 끝에 그 모순을 “성경은 ‘내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매개’이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라는 잠정적인 결론으로 해결하고 있다. 말하자면 성경을 내가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몽학선생으로 여긴다는 것이니, 그럴 경우 내 모순이 어느 정도 설명되기는 한다. 저자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저자는 이미 오래 전에 신앙을 떠났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그 모순을 해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 이야기는 거의 모든 세부 항목에서 불일치한다. 부활 이야기는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21장에 실려 있다. 무덤에 간 첫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였나(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함께 갔나(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갔나(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를 비롯해 다른 여인들이었나(눅)?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나(막/눅/요), 분명하지 않았나(마)?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이 천사인가(마), 한 청년인가(막), 아니면 두 사람인가(눅)? 그들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본 것을 말했나(요), 그러지 않았나(마/막/눅)? 무덤에 있던 사람들은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을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하라고 했나(마/막), 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 그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했나(눅)?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들은 것을 말하기 위해 갔나(마/눅), 그렇지 않았나(막)? 제자들은 예수를 보았나(마/눅/요), 보지 못했나(막)? 제자들은 예수를 갈릴리에서만 보았나(마), 예루살렘에서만 보았나(눅)?”
저자는 이런 불일치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끼워 맞추려면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기록한 사람들이 이를 목격한 증인이 아니며, 이 기록은 수십 년 후 다른 지역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에 기초한 것이며, 불일치가 단지 세부항목 몇 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이야기들은 역사가들이 과거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정할 때 토대로 삼을 만한 자료들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면서 부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힌다.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이 언제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기사만 들어 있다. 그것이 사흘 뒤라는 것도 복음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성경 중에서 성서학자들이 바울의 친서라고 동의하는 7편의 성경에서 바울은 끊임없이 예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예수 부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부터 자기주장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지나친 표현일 수 있지만 어쩌면 바울은 부활을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근거로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부활과 관련한 바울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적 진술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이른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도 예수 사후 25년이 경과되고 나서 기록되었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지만 예수 추종자의 일부가 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울 뿐 아니라 저자 역시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도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부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학문적인 연구대상으로만 여긴다는 말일까?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신관을 설명하면서 묘한 언급을 하고 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이며 기독교가 발흥한 것은 황제숭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인이 황제를 하나님으로 부르자 곧 예수를 하나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역사적 우연일까? 황제숭배와 기독교는 단순히 병행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이 누구인가, 황제인가 예수인가 하는 경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이 살던 환경의 영향 아래에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인 것이다.”
이 말 대로라면 예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추종자들이 신성한 존재로 올렸다는 게 아닌가. 이것은 신성한 존재가 인간이 되었느냐, 인간이 신성한 존재가 되었느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추종자의 의지로 신성과는 거리가 먼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 조작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앞선 주장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후에 그런 논의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저자가 무슨 뜻으로 이런 주장을 펼쳤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내가 관심을 두고 읽었던 것과 다소 거리가 있지만 ‘유일신’과 ‘단일신’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용어만으로는 그 차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유일신은 세상에 신이란 오직 하나라고 믿는 것이고 단일신은 신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자신들은 한 신만 믿는다는 차이가 있다. 십계명에서도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반증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유일신이라는 말에 너무 익숙해 있다 보니 미처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히브리 성서는 대부분 단일신론적 관점을 보였고 유일신론적 관점은 오히려 소수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대에는 신의 존재가 피라미드형으로 연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모든 사물의 원천이며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궁극의 신’을 정점으로 해서, 환상적 능력을 갖춘 ‘위대한 신’, 그 아래에 ‘기능별 지역별 신’, 신과 인간의 중간 존재인 ‘다이몬’으로 이어졌으며 인간도 ‘신성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개종한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있으며 저 위에 홀로 계신 최고 주권자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물론 신의 영역에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살던 시대에 대다수 유대인들이 거의 유일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나 케루빔과 같은 다른 신성한 존재들이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성서에 나오는 주님의 천사는 천사도 되고 하나님도 될 수 있었으니, 천사들은 신적 존재였고 예배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인간 모습으로 올 수도 있는 존재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나 심지어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신들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한 분 하나님과 같다는 뜻은 아니었고, 이 신들은 한 분 하나님의 권위와 지위와 능력을 ‘일부’ 공유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는 것은 온전한 유일신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지위와 능력의 일부만 공유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예수 시대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를 인간으로 오신 신성한 존재가 아닌 신성한 존재가 된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의 또 다른 반증으로 말이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