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현지법인에서 십삼 년을 근무했다.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능력에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사업 여건 때문에 당초에 가졌던 포부는 흔적조차 없어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좌절과 낙심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수년은 정당한 공사비를 지급하지 않은 사우디 정부에 맞선 소송으로 고통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고통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것은 신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고통과 맞서야 했던 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때 바트 어만을 만났다.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라는 책은 제목만으로도 매달릴 조건이 되었다. 물론 내가 겪는 고통은 성경에 나오는 의인들의 고통에 빗댈 일은 아니다. 나로서는 애매한 고난일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자업자득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고난 받는 의인에 자신을 빙의해 성경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성서비평이라는 것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 평소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건국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던 김기흥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트 어만을 만났고, 그가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저서를 찾아보니 평소에 궁금해 하던 것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모두 일곱 권이다. 하나 같이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그 일곱 권을 모두 읽기로 마음먹고 어제로 읽기를 마쳤다.
평신도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 신학자들이 펴낸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욕으로 도중에 그만두지 않도록 너무 힘들여 읽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저 한두 가지 질문이라도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일곱 권을 모두 읽었지만 결과는 정말 마음먹었던 그대로 되었다. 읽었으되 읽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중에 알아들을 만한 것을 추려서 소감과 함께 리뷰라고 작성했지만 그것은 그 나마라도 잊지 않으려는 메모에 지나지 않는다.
바트 어만의 책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에게 길잡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써놓았던 리뷰의 링크를 여기에 올린다. 나름 알아들은 것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다. 혹시 책을 읽고 나서 리뷰에서 오류를 확인했다면 친절히 지적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리뷰는 읽은 순서가 아니라 발간된 순서로 링크를 걸어 놨다.
<Lost Christianities: The Battles of Scripture and the Faiths We Never Knew>
2003년 발간
성경을 선택하는 정경화(Canonization) 과정과 이 과정에서 정경으로 선택되지 못한 외경과 신뢰성을 의심받는 위서를 다룬다. 저자가 이 책에서 열거한 외경은 복음서 16권, 행전 6권, 서신서 13권, 계시록 9권까지 총 44권에 이르며, 정경으로 선택된 성경이나 외경의 바탕이 되는 필사본은 무려 5,400종에 이른다. 정경이 완성된 후 정경을 선택한 이들은 반대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어만은 다루는 위서는 내용을 위조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문서를 작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https://brunch.co.kr/@ispark1955/601
<Misquoting Jesus: The Story Behind Who Changed the Bible and Why>
2005년 발간
성경에서 같은 구절이 서로 다른 것을 ‘이문(異文)’이라고 하는데,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바탕이 된 여러 사본의 ‘이문’은 ‘수십 만 곳’에 달한다. 최근까지 밝혀진 사본은 5,700여종이다. 이와 같은 ‘이문’의 대부분은 하찮고 사소한 것이다. 필사 과정에서 실수로 본문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문’이 이와 같이 실수로 생긴 것만은 아니다. 당시 이단 기독교인들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을 변개했듯이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 기독교인이 성경 본문을 변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자기들이 믿는 교리를 강화하기 위해 본문을 변개했다. 그런가 하면 원래 본문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 후대에 추가되기도 했다. 후대에 이루어진 정경화작업 과정에서 이 부분이 어떤 이유로 멸실되었을 것으로 판단해 그것을 추정해 채워 넣었을 수도 있고, 편집자의 신앙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https://brunch.co.kr/@ispark1955/530
<God's Problem: The Bible Fails to Answer Our Most Important Question-Why We Suffer>
2008년 발간
고통이 죄에 대한 징계라는 관점은 성경 어느 한 부분에 잠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 결과 약자들이 보호받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당하는 극한의 고통을 생각하면 고통이 죄에 대한 징계라는 관점은 언어도단이다. 자연재해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 또한 하나님의 속성이신 사랑하심과 전능하심에 부합하지 않으며, 불가지론은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또한 신약시대에 와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을 설명하는데, 어만은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렇게 삶과 관계없는 신앙을 왜 가져야 한다는 것인지 묻는다. 이런 물음이 해결되지 않아서인지 저자는 이후로 신앙을 떠났다.
https://brunch.co.kr/@ispark1955/200
<Jesus, Interrupted: Revealing the Hidden Contradictions in the Bible>
2009년 발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성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자신이 생각하고 믿으며 설교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편지를 썼을 뿐이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의 책이 그 자체로 읽히고 이해되기를 바랐을 것이며 다른 모든 저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자들이 지향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각 저자가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지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마태의 가르침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으로 읽고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울러 성경 각 권은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쟁점을 다루기 위해 쓰인 것이므로 중요한 쟁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동역자들이나 그 동료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 다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수십 년 후에 기록한 것이다.
https://brunch.co.kr/@ispark1955/538
<How Jesus Became God : the Exaltation of a Jewish Preacher from Galilee>
2014년 발간
예수 생전에 제자들을 포함한 추종자들이 예수를 철저하게 인간으로 이해했다. 교사, 랍비, 예언자, 또는 ‘메시아적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메시아를 신성한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인간’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명예를 부여하신 존재라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를 명시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른 경우가 거의 없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명료하게 선언하는 내용이 없고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공관복음은 ‘신성하게 된 인간’으로 표현했고 요한복음은 ‘인간이 된 신성한 존재’로 표현했다. 저자는 예수가 정말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했다면 다른 복음서에서도 최소한 그 사실은 언급했어야 한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어만은 기독교가 부활신앙 위에 서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부활의 역사성은 부정한다. 아울러 서문에서 자신은 더 이상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하는 질문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하는 역사적 질문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밝힌다.
https://brunch.co.kr/@ispark1955/641
<The Triumph of Christianity: How a Forbidden Religion Swept the World>
2018년 발간
기독교 이전에는 다신(多神)주의였고, 다신주의에서는 새로운 신을 숭배하고 싶다고 해서 지금까지 숭배해오든 것을 그만 둘 필요가 없었다. 당시 유대교를 제외하고는 ‘자기들이 믿는 유일신 말고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배타성’은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 이 배타성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완강하고도 불관용적인 열성을 보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종교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경쟁상대를 제거해가면서 성장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종교가 그대로 건재해 기독교가 성장해도 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역사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의 승자로 올라선 메커니즘으로 배타적인 불관용 이외에도 영생의 교리, 초기 기독교인들이 행한 기적, 기독교의 엄격한 도덕성과 더불어 강력한 성직 체제를 꼽을 수 있다. 이교와 다르게 그들의 신념을 전파하는데 효율적인 성직계급 체계를 확립해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https://brunch.co.kr/@ispark1955/639
<Heaven and Hell: A History of the Afterlife>
2020년 발간
우리가 받아들인 사후 세계관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어떻게 공평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공정하다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빚어낸 개념이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심각한 박해와 순교를 지켜보면서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데도 저렇게 번영하는데 옳다고 믿는 것을 고수한 자신들은 고통 받다 죽는 게 과연 공평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 의문은 “종말 때 죽은 개인을 부활시켜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생각으로 발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상벌에 해당하는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의는 언제인지 모를 먼 미래가 아니라 죽음 직후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는 즉시 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으면 곧장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벌도 상도 한 번의 생애 동안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이 내리는 상과 벌도 영원할 것이라는 사고의 변화를 거치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냈다.
https://brunch.co.kr/@ispark1955/632
이와 같이 성서에 대해 넓고 깊은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낸 바트 어만은 놀랍게도 나와 동갑이다. 내 나이에 그런 성과를 만들어 낸 것이 놀랍다는 것인지, 내 나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어서 놀랍다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동안 썼던 리뷰를 정리하면서 그가 출간한 책을 살펴보니 번역서로 나온 일곱 권 말고도 여러 권이 더 있다. 그중 <Forged>라는 책이 눈길을 끈다. 2003년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과 2005년 <성경 왜곡의 역사>에 이어 위서의 관점에서 쓴 성서비평 서적이다. 목차를 보면 어만은 신약성서 27권 중 9권을 위서로, 9권을 실제 저자와 알려진 저자가 다른 것으로 판단한다. 어만이 위서로 판단한 것은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유다서이다. 어만이 실제 저자와 알려진 저자가 다른 것으로 판단한 성경 9권은 당초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가 후대에 와서 제자들의 이름을 빌린 것이 대부분으로, 이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해석해 위서는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가 이에 해당한다. 이 책이 2011년에 발간되었으니 앞선 두 책의 심화편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발간된 어만의 번역서가 2021년에 출간되었으니 어쩌면 앞으로도 그의 책이 더 번역서로 나오지 않을까. 이 책이 그중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320쪽.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서로 읽는 건 부담스럽다. 그 시간이면 다른 책을 몇 권을 볼 텐데.
어만의 책을 읽어가면서 성서비평과 성서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최근에 성서비평과 관련한 글이 하나둘 보이기는 하는데, 그동안 전혀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궁금했지만 조심스러워 물어보지 못했는데. 놀라운 것은 역사적 예수로 대표되는 성서비평에서 다루는 내용은 신학교 교육과정에 대부분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평신도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은 목회자들이 그런 내용을 다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파문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거나, 교인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어떻게 진리를 다루는 종교인이 그 진실을 감춘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