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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13.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9)

지금은 클래식을 즐겨 듣지만 사실 학교 다닐 때까지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오페라 <아이다> 보러간 것이 그렇고, 고등학교 때 교회 형이 슈트라우스 <천둥과 번개> 폴카를 크게 틀어놓고 방 청소하던 모습도 클래식과 거리를 좁혀준 계기가 되었다. 1977년 파바로티가 방한해 이대 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그때 TV 공연광고에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이태리 가곡 <Vaga luna, che inargenti> 덕분에 클래식에 한 발 더 다가가기도 했다. 아마 오디오 갖기 전에 샀던 음반에 그 곡들이 다 들어있었지 싶다.


오디오를 갖게 될 무렵 음반은 흔히 빽판이라고 불렀던 해적판과 제대로 값을 치르고 발매한 라이선스 판으로 나뉘었다. 물론 원판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돈이 많거나 열렬 팬이나 되어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해적판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긴 원서 교과서도 모두 복사판이었다. 당시 빽판은 삼사백 원 정도 했고 라이선스 판은 이천 원이나 했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팝송이야 한 때 지나면 그만이니 굳이 돈 들이지 않고 빽판을 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공들여 오디오 장만하고 빽판으로 채우는 건 왠지 아쉬웠다. 두고두고 들을 거라면 오래도록 들을 수 있는 라이선스 음반이어야 하겠고, 그러자니 클래식 말고는 마땅한 음반이 없었다. 통기타 가수들도 음반을 내기는 했는데 기억에 남아 있는 음반은 김민기, 양희은, 튄폴리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문외한이 클래식 음반을 사자니 난감할 수밖에. 뭐가 뭔지 알아야 살 것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 고른 것이 우리 가곡 음반이었다. 당시에는 클래식은 성음 음반이 가장 많았는데 내가 처음 산 음반은 아마 지구레코드인가에서 나온 음반이었을 것이다.


세상 참 좋기는 하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처음 손에 넣었던 한국의 가곡 1집과 2집 자료가 보인다. 바리톤 오현명 선생, 테너 안형일 선생. 두 분은 당시 한국 성악계를 받치는 양대 거목이었다. 테너 신영조 선생, 소프라노 강미자 선생, 메조소프라노 김청자 선생과 백남옥 선생은 당시 젊은 성악가에 속했다.


강미자 선생의 한이 깃든 것 같은 음색에 매료되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찾아서 들었다. 아리아 음반도 있었지만 그분 음색에는 한국가곡이 훨씬 잘 맞았다. 신영조 선생의 노래는 그 음반으로 처음 들었는데, 보기 드문 미성이었다. 아쉽게도 그 음반에 실려 있던 <황혼의 노래>만큼 기억에 남는 곡은 듣지 못했다. 오현명 선생은 거제도 현장에서 일할 때 발주처 소장의 사돈이셨는데, 현장 근처에 놀러왔다가 잠깐 현장을 들리신 일이 있어 먼발치에서 뵈었다. 정진우 선생의 피아노 반주로 열린 오현명 선생 독창회에 다녀온 일이 있다. 삼십 년쯤 전에 지금 사는 홍은동 집으로 이사 올 때 안형일 선생 댁이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오래 전에 이사 가시고 그 자리에 답답하게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백수가 눈앞이신데 아직 생존해 계신 모양이다. 백남옥 선생은 키가 훤칠하게 큰 미인이셨다. 언젠가 현대백화점에서 열린 테너 박인수 선생 독창회에 간 일이 있었다. 운 좋게 가장 앞자리에 앉았는데 백남옥 선생이 옆에 와서 앉으시는 게 아닌가. 실제로 보니 TV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우아한 모습이었다. 박인수 선생의 노래보다 백남옥 선생 옆에 앉았던 게 더 기억에 남았다. 직접 사사한 것은 아니지만 아들의 스승이기도 하셨다.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활기찬 모습 때문에 ‘백효리’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선생께서도 그 별명을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들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팬이라고 말씀드리니 무척 좋아하시더란다. 인기인이셨다는 것이지.


나는 소프라노보다는 메조소프라노나 알토 같은 저음을 더 좋아한다. 편안하니까. 그래서 김청자 선생과 백남옥 선생 노래를 즐겨 들었다. 나중에는 메조소프라노 정은숙 선생, 정영자 선생, 김신자 선생 노래를 좋아했다. 그런데 김신자 선생의 <언덕에서>를 유튜브에서 찾을 수 없네. 오현명 선생께서 부르신 게 있구먼. 그것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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