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손에 넣은 첫 번째 라이선스 음반은 퇴계로 DP&E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샀다. 아르바이트 하던 곳 건너편 동국대학교 후문 올라가는 길에 조그만 음반 가게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음반 가게에서는 늘 노래를 틀어놓았다. 그 가게에서 틀어놓은 노래는 클래식은 아니었던 것 같았고, 클래식 음반을 얼마 들여 놓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작정하고 산 첫 음반이 우리 가곡이었던 것이 그 가게에서 살 수 있는 클래식 음반이 그것뿐이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음반은 한 주에 하나 살까말까 할 정도였는데 음반가게는 매일 가다시피 했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 하나 사려면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고르듯.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가 DP&E점이기는 했는데 사진작가들이 사랑방 같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늘 담배 연기로 뿌옇고 왁자지껄했다. 음반 가게는 그와는 달리 아늑하고 늘 좋은 냄새가 났다. 거기에 좋은 음악도 깔리고. 어떤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꼈던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쯤 되면 주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하겠지. 뭘 묻나, 주인이 남자였으면 분위기가 그랬겠는가.
어느 날 그 가게에 가니 나보다 열 살쯤 위로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주인이 내게 남편이라며 인사를 시켰다. 몹시 당황해 허둥지둥하다가 돌아왔다. 그 후로 다른 곳에서 음반을 사기 시작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기는 한데, 이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 가게에는 클래식 음반이 몇 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게에서 기억나는 게 하나 더 있다. 가게 주인은 언제나 뭔가를 녹음하고 있었다. 당시 카세트테이프가 막 대중화 될 때였는데, 알고 보니 손님에게 신청 받은 곡을 녹음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곧 유행처럼 번져서 어지간히 큰 음반 가게를 빼고는 으레 그런 주문을 받았다. 카세트 앞뒤로 한 시간 정도 되는 분량을 녹음해주는데 오백 원이었던가 그랬다. 빽판 하나 살 값이면 노래 열댓 곡을 담을 수 있으니 주문이 밀릴 수밖에.
오디오를 장만하고 나서 나도 열심히 그런 테이프를 만들어 여러 사람에게 나눠줬다. 나중에는 더블데크 녹음기를 연결해 편집본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복사해 나눠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눠준 게 몇 백개 보다는 훨씬 많지 않았을까.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인가 아내가 잠시 텔레마케터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살벌하지도 않고 부업치고는 수입도 괜찮았고 근무 시간 중에 여유도 많았다. 나도 오다가다 들르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였다.
텔레마케터라는 게 결국 고객을 설득하는 일인데, 아내에게 선물로 테이프를 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 후로 그만둘 때까지 꽤 오랫동안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줬다. 고객 반응이 아주 좋아서 한동안 아내에게 구박을 좀 덜 받았다. 매번 녹음하는 게 아니라 편집본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복사해주다 보니 편집본에 이름을 붙여야 했다. 어느 눈치 빠른 고객은 카세트테이프 겉면에 ‘포크송(2)’ 이렇게 표시해놓은 것을 보고 그러면 ‘포크송(1)’도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