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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22.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13)

나는 졸업과 취업과 결혼을 한 해에 모두 치렀다. 80년 5월에 지금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전신인 자원개발연구소에 들어가고, 9월에 졸업하고, 11월에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한 해 뒤에 아들을 얻었다. 연구소에 다니면서 동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능력을 깨닫고 82년 말에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로 옮겼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회사를 옮기고 서울로 이사 나올 때까지 음반을 사기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연구소가 있던 가리봉동에는 마땅히 음반을 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반을 사려면 통근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가서 내려야 하는데, 통근열차 타고 집에 가야한다는 부담에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오 년 음반을 제대로 사지 못하고 서울로 이사 온 후에야 다시 음반 목록을 추가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서울을 떠나신지 오래 되었고 딱히 가까운 친척도 없었으니 서울 어디로 이사하던 상관이 없었을 텐데도 굳이 자랐던 돈암동 언저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서 퇴근길에 들러서 음반 살만한 곳을 찾다가 명륜동에 있는 ‘카네기 레코드’라는 가게를 드나들게 되었다.


명륜동은 내게 특별한 곳이다. 가난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소년이 세월이 흘러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혈혈단신의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린 곳이고, 내가 그 두 분 도시이주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만 해도 살아남을까 싶었던 아이가 장성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여유롭게 음반을 사러 드나들었으니 왜 소감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카네기 레코드’ 주인은 나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분이었는데, 뭔가 사업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형님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음반가게를 맡았다고 했다. 그러니 장사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밖에. 그래도 워낙 음악은 좋아하는 분이어서 그곳에 가면 음악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내가 앉을 곳이 없을 만큼 좁은 가게였는데도.


얼마 후 말도 없이 가게를 접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서성대다가 문득 자기에게 ‘카네기 레코드’를 맡긴 형님이 대학로에서 음반 가게를 하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당시 음악 애호가라면 한두 번을 들려봤을 그 유명한 ‘바로크 레코드’였다. 그곳을 드나들면서 비로소 클래식 음반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바로크 레코드’에는 근처에 있는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의사들이 취미로 뭐를 해도 전문가 못지않게 빠져든다는 이야기는 진즉 듣고 있었는데, 그건 클래식 음반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곳은 음반 가게이기 전에 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같이 어울려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었지만 서울대 병원 의사라는 아우라도 그렇고 그들 이야기 속에 끼어들 만큼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악 이야기라면 어떻게 엄두를 내보겠지만 지휘자의 음악 해석방식이나 연주자의 특성을 분석하는 이야기는 들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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