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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24.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14)

LP음반과 관련해 지금도 의아한 것이 하나 있다. 당시 LP음반은 처음 찍어내는 음반(초판)과 두 번 세 번 찍어내는 음반의 음질이 다르다고 했다. 마스터 음반이 사용할수록 마모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처음 찍어낸 음반만 찾는 애호가들이 있었다.


‘바로크’에 가면 음반 진열장 맨 아랫줄에 고객 전용 칸이 정해져 있었다. 마치 사물함처럼. 초판이 나오면 주인이 그곳부터 먼저 채웠다. 고객에게 묻지도 않고. 물론 주인이 고객의 취향을 훤히 꿰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고객이 자기 칸에 채워져 있는 음반을 두 말 않고 찾아갔다. 진열장 아랫줄에 자기 전용 칸이 있다는 것이 고객에게는 상당한 영예였다. 주인이 자기의 음악적 취향을 기억해주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음질이 조금이라도 나은 초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구체적인 이익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LP음반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초판 음질이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사실이고, 단골 고객들이 그렇게 초판을 구하는 것이 특별대접이어서 으스댔던 것이었을까? 그건 그냥 하는 소리고, 가게 주인이 새로 나온 음반을 다른 고객들 보다 먼저 챙겨주는 것을 특별대접으로 여겨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얼마 후 나도 거기 한 칸을 얻었다.


진열장 아랫줄에 한 칸을 얻으려면 한 번에 음반 한두 장 사는 수준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 음반을 그렇게 사들고 갔다가는 아내에게 한 소리 듣는 게 뻔했고, 그래서 음반 살 때마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집에 가져갈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집이라도 넓으면 어떻게 아내 눈을 피해보겠지만. 나만 그랬던 건 아니고, 음반 좀 가지고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뭐라고 그러기는 했지만 딱히 문제라고 여겼던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작지도 않은 LP음반을 좁은 집에 감춰가지고 들어온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 그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남편이라는 자가 철딱서니 없이 음반이나 사들고 들어오는 걸 푸념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보고도 모른 체 했을 것이고. 사실 정해진 용돈을 먹고 마시는 데 안 쓰고 음반 사는데 쓴 것은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 아니냐.


한 번은 기다리던 파바로티 음반이 있었다. <Mamma>가 타이틀 곡으로 걸린 이태리 가곡 음반이었는데, 발매 소식이 들리고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창 출장 다니던 시기여서 서울 올라올 때 짬짬이 들렀는데도 구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내가 문을 열어주는데 등 뒤로 뭔가 감추고 서 있었다. 몇 번씩 허탕 치고 돌아온 것을 보고는 출장 가 있는 사이에 ‘바로크’에서 구해다 놓은 것이었다. 워낙 아내나 나나 선물 같은 걸 별로 챙기지 않고 살기는 했지만, 이 음반 선물이 아내에게 받은 것 중 단연 으뜸이 아닐까 한다. 동생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 굳이 대학로까지 나가 구해온 것도 고맙고, 내 취미를 존중해준 것도 고마웠다. 사실 그때까지 아내는 그다지 음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이후로 음악을 함께 즐기는 기회가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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