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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1. 2020

[역사적 예수 1] 읽게 되기까지

역사학자 김기흥 교수의 '역사적 예수'를 읽고 (1)


저는 자연과학인 지질학을 공부하고 40년 동안 그와 관련된 업무로 생업을 이어오고 있는 60대 후반의 사람입니다. 국민학교 때 성탄절 행사에 끌려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이후 졸업할 때까지 예장 합동에서 자라났고, 현장에서 근무할 때 예장 고신 교회를 출석한 일이 있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예장 통합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나 몇 년 전 동성애를 대하는 교계의 태도에 회의가 들던 차에 고려대 김승섭 교수님의 글을 접하면서 동성애 뿐 아니라 교회 내에 흐르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되어 관련된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진규선 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진 목사님의 글을 통해 동성애를 포함하여 그동안 진리로 알고 있던 다양한 관념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이나 성서학에는 백지상태인 사람으로서 진 목사님의 글을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것이 신앙과 무관할 수 없는 일이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때로는 우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 우문의 하나로 ‘역사적 예수’를 읽게 된 과정과 그를 읽고 깨달은 바,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함께 나눌까 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읽게 되기까지


몇 해 전에 장관 내정자가 창조과학을 추종하는 인사여서 논란이 되었고 결국 낙마한 일이 있었다. 지구 역사가 6천 년이라는 창조과학의 주장은 비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논란을 지나 조롱의 대상이었는데, 과학과 무관하다 할 수 없는 부처의 장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인사였다.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허구에 대해 나름 견해를 갖고는 있었지만 식자층이라 자처하는 인사들 중에 창조과학을 추종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지는 미처 몰랐다.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그를 바탕으로 40년 동안 생업을 이어오고 있는 내게는 그런 사실이 놀라움을 지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성경의 창조 기사가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시간 스케일과 다르거나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과 은유를 쓸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기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지금까지 입증된 과학을 창조과학이라는 미명으로 무력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창조 기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생업의 현장에서 지극히 불균질한 자연이 일정한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의 질서를 섭리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성경의 많은 기사들이 기이하고 때로 모순처럼 보이더라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내게는 성경의 창조 기사, 좀 더 확장해서 구약시대의 기사는 상징과 은유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신약시대로 들어오고 난 후에도 지금의 상식이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사가 적지 않은데, 그 중 특히 예수 탄생과 부활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내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의 저자인 국사학 전공의 역사학자 김기흥 교수가 ‘유일신 야훼’를 출간하고 뉴스앤조이와 한 인터뷰를 본 일이 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진규선 목사께서 저자의 전작인 ‘역사적 예수’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고 바로 사서 읽게 되었다. 인터뷰는 ‘유일신 야훼’에 관한 것이었지만 ‘역사적 예수’에 궤를 같이 하는 책이라 그 인터뷰로 ‘역사적 예수’의 집필 동기며 과정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이끌어나가는 주장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만큼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이 주장을 이끌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진리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텐데, 그 상황이 저자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편견 없이 이 책을 읽기 위해 진 목사께서 올려놓은 서평은 잠시 접어두었고, 근 일주일에 걸쳐 낯선 용어의 숲을 뚫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는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이해해 보겠다고 수차례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밑줄 그은 부분을 텍스트로 만들며 다시 한 번 정독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 신앙인인 저자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저자의 주장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피고, 그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생각하기로 했다.


먼저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언급한 후,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고, 그것이 저자의 주장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펴보겠다. 그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는 하겠지만, 답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만든 진 목사께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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