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김기흥 교수의 '역사적 예수'를 읽고 (2)
나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사람의 손을 빌어 기록되었고, 따라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유한한 사람이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한 것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상징과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문자로 남은 성경은 성경 기자의 지식수준과 당시의 가치관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런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예수’를 읽었다.
나는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견해를 읽고 이를 판단할 만큼 아는 게 없다. 따라서 역사성 판단근거가 합리적인지 보다는 역사성을 판단한 결과에 초점을 맞췄다. 즉, 예수는 실재하였던 역사적 인물인가, 과연 내가 믿고 있는 신적 존재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만약 이 책에서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거나 신적 존재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면 내 신앙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 또한 본인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밝히고 있으니 그런 결론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위에 언급한 궁금증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서신과 복음서를 중심으로 성경의 역사성을 평가하였다. 바울서신이 복음서보다 20여년 정도 앞선 것으로, 복음서는 마가-마태-누가-요한 순으로 기록되었다. 바울서신은 비록 바울이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상당수 살아있던 시기에 예수신앙공동체를 향해 공개적으로 진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예수를 직접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이 당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굳이 예수의 행적을 책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소멸되어감에 따라 후대를 위해 이를 모아 보존할 필요를 느꼈고, 이것이 복음서 편찬으로 이어졌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행적을 굳이 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애써 자료를 정리하거나 보존하지 않았다. 또한 복음서를 역사서로 편찬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료의 사실성보다는 공동체가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이 공동체 신앙을 제고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취사선택 했다. 아울러 자신들의 신앙고백적인 내용도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복음서는 해당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도록 예수 상을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복음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여기고 예수의 역사를 찾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만 복음서를 예수의 역사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되, 그것이 열렬한 추종자의 신앙고백이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른 산물이라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저술된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는 윤색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세련미는 떨어지지만 그만큼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도 그렇고 누가복음에도 예수 탄생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 예수의 탄생설화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면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최고의 근거인 탄생설화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이보다 10-20년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족보와 함께 서로 다른 탄생설화가 실려 있다. 이는 유대사회의 멸망을 불러온 전쟁을 지나는 동안 전능한 신의 위로와 임재가 더욱 강력하게 요청되었으며, 이에 따라 구전으로 전해내려 오던 예수 탄생의 신비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복음에 구체적인 연대와 함께 호구조사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매우 비현실적이며 또한 역사적 근거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때 예수의 역사적 실재를 일반사의 기준으로도 부정하기 어렵다. 로마 대화재 때 희생된 그리스도인에 관한 타키투스의 ‘연대기’ 기록으로 보아도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실재는 달리 의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조작해내기 불가능할 정도의 시대를 초월한 지성과 영성, 탁월한 감화력을 지녔던 유대계의 한 역사적 존재가 있었음을 달리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며 신비한 체험을 하고서 자신과 모든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자녀임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의 하강과 임재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일종의 신비 체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그 결과 개별적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마태복음에 중풍병자를 고친 기사에서 사람들이 죄 사함의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예수 혼자만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에게 죄를 사할 권한이 있다고 예수가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이 경우 사죄의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며, 예수나 그의 제자 등 죄 사함을 선포하는 사람은 전달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부한 만큼 메시아를 매개로 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았다. 예수는 한 명의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확신하였다. 복음서가 전하는 일부 내용과 달리 예수 스스로는 선지자들이나 요한계시록의 저자, 심지어 삼층천을 보았다는 바울과도 다르게 아무도 알 수 없는 저 세상 하늘나라 등을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예수가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기 위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만들어나가야 할,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새로운 나라였다.
예수는 애초부터 모든 것을 다 안다거나 장래 일을 다 꿰뚫어 보고 대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신성을 상당히 체현하고 있으나 경험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길을 수정하기도 하며 산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던 것이다. 처형을 크게 걱정하고 근심한 것으로 보아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처형 후에 곧 자신이 부활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대다수 학자들은 예수 자신이 곧바로 부활할 것을 확신했다고 보지 않는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 예수가 인간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희생제사 중심의 유대교 성전체제에 익숙했던 그의 추종자들의 인식이었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전통 역사적 요소들이 뒤틀려 혼재하던 유대 땅 예루살렘이서 거의 유일하게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확신에서 하나님 뜻을 실천하다가 처형된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같은 문제를 제자들이 추후에 얼마나 극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이유로 복음서를 성령의 구술에 의한 무오한 책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진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교회 안에서도 가부장제를 포기하지 않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거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등 처음에는 가능했던 교회 내 여성 지도자의 역할을 오히려 제약하고 후퇴시켰다. 그러나 예수가 뿌려놓은 인간 평등 관념은 고대와 중세를 거치고 근대를 경과하면서 꾸준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세계적으로 여성 해방 역사의 강고한 자양분이 되었다.
복음서의 안식일 후 첫날 아침 부활사건 기사를 볼 때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공통적 요소로 ‘빈 무덤’이 있을 뿐 천사 출현이나 부활 예수의 현현은 복음서들 간에도 일치하지 않는 비역사적, 설화적, 신앙적 요소이다. 복음서에 보이는 예수의 빈 무덤은 베드로나 바울 등은 보지 못한 민중 신도들의 상상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차례 예루살렘에 갔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들에서 그 무덤을 찾아갔다거나 그와 관련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초기 예수신앙공동체들이 예수의 빈 무덤을 숭배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없었던 것을 보아도 이와 같은 추정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안식일은 일단 쉬고 그 다음날쯤 되어서 예수 추종자들 중 일부, 아마도 그의 최후 운명 시까지 십자가 근처에 있었던 여성 제자들이 처형 현장에 보이지 않는 시신의 행방을 수소문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신의 행방을 찾던 이들 중에 감수성 풍부한 여성 제자들이 예수가 혹시 부활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을 개연성이 있다. 여성 제자들의 부활 확신이 커져가면서 다른 남성 제자들도 점차 부활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 듯하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추종자들이 죄 없는 예수는 부활했고, 그래서 무덤조차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면서 부활한 예수가 찾아오셔서 만났다는 고백들이 나타나게 되었건 것이다. 이러한 예수 부활의 믿음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부활사건은 일상에서 흔히 경험되는 사건이 아니고 무덤이 열리면서 확인된 사건도 아니다. 어쩌면 매장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추종자들이 예수가 죽은 뒤 느끼기 시작해 수십일 혹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예수가 여전히 살아 있어 자신과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갖게 한 심리적 종교적 현상이었다. 마음의 감동으로 또는 꿈이나 환시, 환청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예수를 다시 만나는 체험을 한 것이며, 이것이 추종자들 상호간에 공감을 이루어 예수가 부활했다는 확신을 가져온 사건이고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