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김기흥 교수의 '역사적 예수'를 읽고 (3)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라고 한다. 머리로도 알겠고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그 사실에 감동이 되지도 눈물이 쏟아지지도 않는다. 천지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굳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을 보내셔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하셔야할 당위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부활절을 앞두고 기도하는데 이 문제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 십 년 가까이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이 숙제를 풀어보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매번 애만 쓰고 만다.
나는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라’는 구절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씀이라고 여기며,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이 말씀을 의지해 해결해 나간다. 성경 전편을 통해 흐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 말씀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감사하나 굳이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생각이 이러니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역사적 사실이던 상징과 은유이던 내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자 전부인 것으로 이해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 받을 충격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결론이 내게,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먼저 내가 무엇을 믿는지, 그것이 다른 그리스도인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보겠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나, 사람의 손을 빌어 기록된 것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유한한 사람이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한 것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상징과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문자로 남은 성경은 성경 기자의 지식수준과 당시의 가치관을 뛰어넘을 수 없다. 창조기사는 기독교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상징과 은유라고 생각하지만, 신화라는 주장도 배제하지 않는다.
둘째, 출애굽 당시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고 요단강이 멈춰서는 것은 신비한 일이지만 역사적 사실일 것으로 생각했다. 몇 년 전, 모세의 신명기 유언 설교가 이루어졌던 모압 광야가 생각 밖으로 좁은 것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결국 상징과 은유는 창조기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셋째,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예수의 성육신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글을 쓰면서 비로소 그에 대해 크게 고민해 본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크게 고민해본 일이 없으니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딱히 신앙이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적과 표적에 대한 생각 또한 이와 같은데, 이는 내가 신약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구약성경을 상징과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넷째, 삼위일체는 정말 모르겠다. 몰라도 신앙을 이어나가는데 아무 지장도 없고, 어쩌면 종교인의 존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신학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에 의해 인간의 몸을 입고 잠시 세상에 현현하신 분이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격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굳이 세 분을 병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을 향해 기도한 기억이 없다. 늘 하나님께 기도했고, 성자와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길을 걷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으로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지만 그곳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다다를 영원한 나라에 대해 기대할 뿐, 거기에 매어 살지는 않는다. 다만 언제든 이 땅을 떠나자고 하실 때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설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내가, 가족이,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생과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베풀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특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대부분 자연 질서를 거스르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그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이 그 증거이다.
일곱째, 우리 모두는 죄인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자비에 의지할 뿐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말씀을 찾아서 듣고 글을 찾아 읽어도 이해도 되지 않고 수긍도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불의한 청지기만도 못한 내 자신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불의한 청지기가 기대했던 주인의 자비 곧 내 하나님의 자비인 것에 생각이 미쳤고, 그 비유는 나를 향한 말씀이었음을 깨달았다.
글을 쓸 때면 늘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 대체로 처음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간혹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경우가 있다. 이번이 그렇다. 지금껏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차근차근히 돌아보고 정리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지 못한 글이 되었다.
써놓고 몇 번 읽다 보니 성경의 역사성, 특히 예수의 역사성이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칠 일은 없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짐작하지 못한 결론이 되었다. 다른 이들이 이런 내 생각을 듣는다면 십중팔구 백안시 하지 싶다. 그들 또한 자신을 차근차근 돌아보면 뜻밖의 결론을 얻게 될 수도 있기는 하겠는데, 아무튼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내 인식은 평균적인 그리스도인과는 상당히 궤가 다른 것으로 보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