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또래들 중에 노래 잘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성가대 찬양 때 그들의 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을 정도였고, 간혹 독창 부분을 노래할 때면 찬양 내용보다는 그들의 노랫소리에 더 정신이 팔렸다. 당시 그 교회로 옮겨 출석한지는 몇 년 되었지만 출장으로 자리 비울 때가 많아 그들과 얼굴이나 알고 지낼 정도였지 말 한 번 건네 보지 않았다. 어느 평일 저녁에 성경공부 때문에 교회에 갔다가 중창 연습 때문에 모여 있는 그들을 만났다. 평소에도 그런 모습이 부럽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끼워달라고 하기엔 소질도 시원찮았고 그렇게 말 걸만큼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다행히 그 중 한 친구가 끌어다 앉혀놔서 못이기는 척 끼어들었다.
기독교 학교를 다녔으니 노래하는 게 익숙했고 내내 성가대도 했지만 그들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이번 한 번은 안면 몰수하리라 마음먹었다. 한 번 미친 척하고 몇 년이 즐거우면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 아니냐 싶었다. 찰나에 이루어진 매우 합리적인 판단 하나 때문에 그 후로 십 년 넘게 그들과 마음껏 노래할 수 있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게 만들어 미안하기는 했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지.
그 중 하나는 성악을 했어야 하는 친구였다. 우리 때만 해도 그게 쉬운 길이 아니어서. 아무튼 교회에서 노래로는 내로라하는 친구, 선배, 그리고 대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테너 하나까지 해서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자식이 커가는 나이라 자식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몇 년 후에 정말로 그 중 한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그때는 자랑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결혼한 아이들이 좋기만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 후로 더 안 하기를 잘했다.
그때 교회 청년성가대에 지휘자가 새로 부임했다. 군대 다녀와서 복학한 성악과 학생이었다. 학생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를 아우라도 있고 성가대를 끌어가는 모습이 여상치 않았다. 본인이 노래도 잘하지만 성가대를 끌어가는 모습이 마치 노련한 조련사가 맹수를 훈련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 맹수로 만들어간다는 게 더 맞겠다. 중창단을 만들어 연습하던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고, 내친 김에 남성성가대를 하나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우리 말고도 노래하고 싶은 갈증을 느낀 이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남성성가대를 만들기로 하고서도 과연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했는데 계획했던 40명을 채우는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기대했던 대로 지휘자의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남성성가대의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우리가 우리 소리에 놀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노래가 좋아졌다. 모두들 신이 났다. 내친 김에 발표회도 하고 음반도 만들자고 했다. 그래서 사오십 분 정도 되는 성가 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기도 하다. 비용을 조금만 더 들이면 CD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CD를 만들지 했다가 유야무야 되었다.
그게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때 남성성가대를 지휘하던 바리톤 왕광렬 선생이 자식이 성악가로 살아가는데 귀한 기초를 놓아주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아주 튼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