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고사 끝난 날 저녁에 성악 선생님을 만나서 한 학기만 성악 공부를 해보고 계속 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입학해 첫 학기이니 크게 시간에 구애받을 상황도 아니고, 성악을 계속하지 않더라도 한 학기쯤 배워놓는 것이 손해 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악 선생께서는 일단 보기 드문 저음이고 가진 소리도 나쁘지 않다며 아이의 기량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이가 들어간 고등학교는 인문계여서 예체능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학교 수업과 전공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자연히 동급생들과 학력 격차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운 좋게도 아이가 입학한 그해 성악을 전공하신 음악 선생께서 애써서 만든 음악 전공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음악 전공자가 기량을 잘 연마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만들고 한 해에 두 번 ‘향상음악회’를 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어디 쉬웠겠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엄청난 노력의 첫 열매를 아이가 누리게 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우연한 일일 수 있겠나.
성악 선생께서는 처음 몇 달 아이에게 발성만 가르치셨다. 당초 한 학기만 해보고 성악을 계속 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는데 한 학기가 지났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가을을 맞았다. 여름쯤 들어서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을에 학교에서 마련한 향상음악회가 열렸다. 자하문 터널 밖에 있는 부암아트홀에서 음대 교수 몇 분을 모시고 성악, 바이올린, 피아노 전공자들이 그동안 준비한 곡을 연주한 것이다.
연주가 끝나고 참관한 교수 분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아이에게 성악을 시키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그런 막연한 질문에 누가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사실 나 역시 물어보면서도 뭔가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교수께서 아이가 보기 드문 저음이라는 것 하나 만으로도 희소가치가 있어 살아남을 거라면서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 그때 그분이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분이 평가한 대로 그 아이가 그 희소가치에 힘입어 지금 결코 만만치 않은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 가수로 십 수 년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분이 자식의 앞날을 제대로 예측한 첫 번째 어른이었다.
두 번째 향상음악회에서는 연주 마치고 음악 교사 한 분이 음악 전공자의 진학지도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분은 놀랍게도 학업을 포기하라고 했다. 당시 음대 입시는 대체로 총점 1천 점에 필기가 3백 점이고 실기가 7백 점이었다. 학력고사가 4백 점 만점이었으니 기를 써서 1백 점을 올려놓는다 해도 총점 75점을 올릴 뿐인데, 실기에서는 노력하기에 따라 3~4백 점을 올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입시만 생각한다면 타당한 전략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학생이 학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고민 끝에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사회인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위한 공부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가르치는 학원이나 선생도 없고, 월급으로 성악 레슨과 과외비를 감당할 처지도 되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공부했다. 국어와 영어는 한 과 전체를 틀리지 않고 읽을 때까지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언어가 입에 붙으면 나머지 내용은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런 성과를 얻었다. 수학은 교과서 내용만 익히고 거기에 실린 문제만 반복해 풀게 했다. 교과서에 실린 문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도는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와 과학도 이야기책 읽듯 읽도록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성적으로는 볼품없었을지 몰라도 지금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음악 교사께서 조언했듯 필기점수는 입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아이가 나름의 방식으로 필요한 소양을 갖추도록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옳은 결정이었다. 덕분에 아이와 삼 년 동안 부딪치느라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만큼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지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