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맺은 인연 (26)

by 박인식

1982년 말에 지금 회사로 옮기고 난 후 첫 발령지가 거제도 터널공사 현장이었다. 지금도 거제도는 먼 곳이지만 40년 전에는 정말 멀었다. 기차 타고 부산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거제도까지 들어가는데 빠르면 여덟 시간쯤 걸렸고, 명절 때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서울 가는 귀성버스도 그만큼 걸렸다. 파도가 높아서 배가 안 뜨면 부산에서 거제도까지 네 시간 걸리는 버스를 타야했다. 그때 함께 근무하던 선배 가정에 신세를 많이 졌다. 거기 밖에 집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퇴근해 집에 가보면 방문 앞에 김치가 놓여있기도 했다.


그렇게 김치를 담가주던 선배는 따님을 둘 두었다. 큰애 이름이 이꽃별이었다. 당시 두 달마다 3일인가 4일 휴가를 얻었는데, 해외현장도 아니면서 처자식을 두 달에 한 번 볼 수는 없는 일이어서 한 달은 내가 올라가고 한 달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내려와 며칠 지내다 가곤 했다. 그때 아이는 업혀 다닐 때였고 아이보다 한 살 위인 꽃별이는 걸어 다녔다.


아이가 대학 들어가고 나서인가 꽃별이가 해금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배의 형제들이 음악적 재능이 남다르다고 했는데 아마 그 영향이었을 것이다. (선배의 형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작곡가이시다. 하지만 선배가 한 잔 걸치고 부르는 노래 솜씨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걸 보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이 진실하다.) 덕분에 꽃별이가 출연하는 공연에 몇 번 초대받아 갔다.


꽃별이는 전통적인 해금 연주방식과는 다른 음악을 추구했다. 우리나라 퓨전 해금의 첫 세대가 아닐까 한다. 직접 작곡한 곡으로 발매한 CD가 내가 가진 것만 다섯 종이나 된다. 그 아이는 성은 떼고 ‘꽃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1집의 주제는 ‘꽃’이고 2집의 주제는 ‘별’이었다. 아, 이제는 아이가 아니고 아주머니가 되었다.


언젠가 꽃별이가 우리 내외와 아들까지 공연에 초청한 일이 있었고, 우리 아들 콩쿠르 입상 연주회 때는 꽃다발을 안고 찾아오기도 했다. 이제는 각기 활동하는 공간이 달라 그 후로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다른 분야의 음악을 하고 있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꽃별이는 한동안 소리꾼 김용우와 함께 공연했다. 김용우는 국악인의 정통 엘리트 코스인 국악고등학교, 서울대 국악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국악인이지만 국악만 고집하지 않았다. 클래식, 재즈, 아카펠라, 심지어 클럽음악과 함께하면서 현대감각에 맞춰 다양하게 변신했다. 따지자면 퓨전 국악인인데 솔직히 나는 그를 어떤 유형의 국악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본인은 소리꾼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더라. 어쨌거나 꽃별이와 김용우 덕분에 국악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김용우의 소식을 들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늘 눈과 귀를 서울을 향해 열어놓고 살았는데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귀국하고 두 해가 가까워 오도록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과문한 탓이겠거니. 공연 소식 들으면 한 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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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별1.jpg <꽃별 1집 '꽃'>
꽃별2.jpg <곷별 2집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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