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맺은 인연 (25)

by 박인식

<뿌리깊은나무>에서 발매한 판소리 전집은 1974년 1월부터 1978년 9월까지 100회나 지속된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의 결과물이었다. 성황리에 진행된 이 감상회에서는 판소리 다섯 바탕 전체를 당대 최고 명창들의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 감상회에서 선보였던 판소리들이 1970년대 이후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의 전부라고도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감상회는 1970년대 당시 판소리를 담아낸 자리였을 뿐 아니라 현재의 판소리 전승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음악사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연이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 가장 자주 들은 건 단연 조상현 명창이 부른 ‘춘향가’였다. 조 명창이 부른 ‘춘향가’는 판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단박에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시원시원한 음성에 곳곳에 출몰하는 해학어린 아니리가 기가 막혔고 애끓는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큰거렸다. 한 마디로 관객을 무장해제 시켜 그냥 소리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는 무엇보다 발성이 선명해서 좋았다. ‘홍보가’와 ‘수궁가’를 부른 박봉술 명창은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웠고, 정권진 명창이 부른 ‘적벽가’는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는 내게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조 명창의 ‘춘향가’만 되풀이해서 들었다. 그러다 보니 조 명창 소리에 익숙해져서 다른 이들이 부른 ‘춘향가’는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십여 년 지났을 때 안숙선 명창의 ‘춘향가’ 음반이 CD로 발매되었다. 조상현 명창이 부른 것과 달랐지만 조 명창의 노래에서 느낄 수 없던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조 명창과 안 명창의 ‘춘향가’는 ‘낫고 못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안 명창의 음악적 재능은 내가 판단할 만큼 아는 것이 없다. 나는 그저 과하거나 지나치지 않은, 그러면서도 절제된 감정을 통해 절절한 마음을 담아내는 그의 소리가 좋았다.


<뿌리깊은나무>의 우리 소리 음반은 이후 ‘팔도 소리’와 ‘산조 전집’으로 이어졌다. ‘팔도 소리’는 전문 소리꾼이 아니라 각 고장 사람들이 부른 것이었다. ‘팔도 소리’는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생경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간 내가 들었던 팔도의 민요들은 현대적 감각으로 편곡된 것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후반에 국악 기악음반을 꽤 많이 사들였다. 이미 CD가 보편화 되어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때 사들인 LP음반이 적지 않은 걸 보면 CD로 발매된 국악 기악음반이 얼마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이미 명인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기왕에 발매된 음반을 CD로 재발간할 만큼 수요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야금 보다 거문고를 즐겨 들었고 한동안 대금에 심취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고려병원에 몇 달 입원해 계셨는데 바로 옆 병상에 대금의 명인인 서용석 선생이 계셨다. 덕분에 국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을 많이 보았다.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 조통달 명창이 아버지 다른 동생이라고 했던가 그랬다. 조 명창은 몇 번 뵈었고 조관우도 마주쳤던 것 같다. 사우디에서는 이웃집과 떨어져 있어서 마음 놓고 소리를 키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달빛 교교한 밤에 등을 꺼놓고 신쾌동 선생의 거문고와 서용석 선생의 대금 소리를 즐겼던 것이 고단한 삶 가운데 큰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가끔 젊었던 시절에 명창들을 모시고 술자리를 가졌던 일을 말씀하시곤 했다. 아마 묵계월 선생과 안비취 선생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안비취 선생께서 부르신 회심곡 전반부의 가사는 거의 외운다. 그래도 내게 잘 맞았던 것은 이은주 선생으로 대표되는 경기소리였다. 소리가 깔끔했거든. 이후에 이희완 선생의 경기소리도 즐겨 들었다. 평안도 출신이신 어머니가 즐겨 들으셔서 귀에 익었던 서도소리 하시는 이은관 선생의 배뱅이굿 음반도 구해 들었다. 이은관 선생께서는 거의 백수를 누리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소리가 내내 흔들림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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