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맺은 인연 (24)

by 박인식

고등학교 때 2년이나 짝을 했던 친구가 있다. 같은 대학 같은 과로 진학했다. 같은 전공이다 보니 졸업하고 나서도 같은 분야에서 일했다. 나보다 결혼을 조금 늦게 했는데, 신부 집에 함 들어갈 때 당연히 함진아비를 자청했다. 한 상 푸짐하게 받고 나서 골려먹을 생각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에게 짓궂게 노래를 시켰다. 신부는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더니 뜻밖에도 우리 소리 한 자락을 펼쳤다. 애끓는 가사도 그렇고 소리꾼이라고 해도 될 만한 신부의 노래 솜씨에 친구들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알고 보니 판소리 춘향가 중에 이 도령을 떠나보낸 춘향이가 독백처럼 부르는 ‘갈까보다’였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임 따라서 갈까보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보다. 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일도 보련마는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슨 물이 막혔관데 이다지 못 보는고.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동풍 연자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하여볼까. 뉘 년의 고염을 듣고 여영 이별이 되려는가. 어쩔거나 어쩔거나 아이고 이를 어쩔거나. 아무도 모르게 설리 운다.”


이전에도 국악이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함 들어가는 날 들었던 이 노래 하나로 국악에 새롭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외판원이 팔러 다녔다. 그들은 여느 외판원과 달리 정장을 갖춰 입은 말쑥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갖고 다녔던 카탈로그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발매한 판소리 전집도 있었다. 이 전집에는 쟁쟁한 명창들이 부른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 판소리 다섯 바탕에 단가집도 포함되었다.


그때까지 LP로 발매된 판소리 음반을 더러 봤지만 이렇게 다섯 바탕을 온전히 전집으로 만든 것을 처음 봤다.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은 가사와 주석을 담은 책이었다. 음반 크기의 가사집이 백 쪽 가까이 될 만큼 두툼했다. 매 쪽마다 가사가 실려 있고 그 아래에 달아놓은 주석이 가사의 서너 배에 달할 정도로 상세했다. 가격이 얼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한 번에 결제하기는 큰돈이어서 몇 달 월부로 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악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판소리 전집은 상자도 아주 고급스럽게 적갈색 천으로 만들었고 전집 전체를 감싸는 껍데기도 예스러웠다. 판소리 다섯 바탕은 짧은 것이 네 시간 남짓하고 긴 것은 다섯 시간이 넘었다. 사우디에서 근무할 때 달빛 좋은 밤이면 집안에 등을 다 끄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함께 판소리를 듣곤 했다. 안타깝게도 수년에 걸친 소송에 지쳐 급작스럽게 사우디를 떠나느라 그 음반을 가져오지 못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사우디 떠나기 몇 달 전에 그 친구가 암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멀리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어 매일 기도하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그가 병원을 다녀오고 나서 짧게 통화하곤 했다. 항암치료 열두 번 하는 게 한 사이클이라고 했는데 친구는 두 사이클을 마치기 전에 몸이 감당이 안 된다며 항암치료를 중단했다. 그때만 해도 귀국할 계획이 없었던 지라 얼굴 볼 때까지 잘 버티고 있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느 날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내게서 전화가 왔다고 하니 그냥 두라고 하더란다. 부인은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고통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편안하게 떠났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친구 전화로.


그러고 닷샌가 지나서 급작스럽게 귀국 비행기를 탔다. 그럴 줄 알았으면 떠나기 전에 얼굴이나 보도록 서둘렀을 것을. 어쩌면 얼굴 보지 않은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자존심 강한 그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귀국해 먼저 그를 수목장한 곳을 찾았다. 얼마 후 그의 사십구제에서 이젠 할머니가 된 그날의 신부와 그를 너무도 빼다 박은 아들을 만났다. 그의 비석 앞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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