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맺은 인연 (27)

by 박인식

직장 상사 중에 오디오에 심취한 분이 몇 분 있었다. 한 분은 몇 년 동안이나 끔찍이 시집살이를 시켰던 분인데, 뜻밖에 오디오에 관심이 많았다. 뜻밖이라는 건 그분에게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만 그런 게 아니라 오디오에 심취해 있는 이들 가운데 정작 음악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음질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리야드에 주재하는 건설사 모임에서 만난 분 하나가 억대의 오디오를 갖고 있다고 해서 들으러 간 일이 있었다. 큰 방에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오디오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뭐라고 설명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고 그저 무척 비싼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소리나 한 번 들어보자고 하니 음반을 꺼내는데 어이가 없었다. 오래된 트로트 음반 몇 장이 전부였고 그 흔한 클래식 명곡집 하나가 없었다.


트로트의 수준이 낮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노래를 가려듣지 않는다. 노래면 다 좋아 한다. 사실 한 잔 얼큰하게 걸치고 부르는 노래로는 트로트가 단연 으뜸 아닌가. 클래식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호의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취향일 뿐이지. 그런데 억대의 초고가 오디오라면 적어도 그 음질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음반이 필요하지 않겠나. 대중가요나 팝송이라면 그저 흔히 있는 오디오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인데. 그 정도 초고가 오디오는 다양한 악기로 아주 섬세하게 음악을 표현하는 관현악 정도를 감상하는데 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끔찍하게 시집살이 시켰던 상사와 일했던 거의 같은 시기에 옆 부서에서 근무하는 나이 드신 부장 한 분이 오디오 고수라는 소문을 들었다. 말수가 적은 분이어서 인사만 하고 지내다가 그 소문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음악 이야기가 나오니 그분이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속에만 담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분은 당시 셋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오디오 가격이 전세 값만큼 된다고 했다. 90년대 초반 언저리였을 텐데, 삼천만 원인가 그랬다. 그분은 기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많이 배웠다.


한 번은 문제의 상사께서 스피커 보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업무시간에야 어쩔 수 없어도 업무 끝난 후에 뭐한다고 거길 따라 가겠나마는, 다른 것도 아니고 스피커라는데. 용산전자상가에 있는 스피커 전문매장에 가서 이것저것 들어보는데 들어볼수록 속만 상했다. 그냥 집에서 있는 오디오로 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후로 뻔질나게 그 가게를 드나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원효대교만 건너면 되었으니 퇴근길에 들러 군침만 삼키다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자그마한 서라운드 스피커에 꽂혀버렸다. 용돈으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 이리저리 융통해서 기어코 사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들고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생각 끝에 허름한 시멘트 포대 같은 종이로 뚤뚤 말고 노끈으로 질끈 묶어서 들고 갔다. 스피커 가게 가는 건 아내도 알고 있었으니 선배가 좋은 스피커 하나 사는데 곁에서 얼쩡대다가 그냥 싸구려 하나 거저 얻었노라고 했다. 그러고는 설치하지도 않고 한동안 처박아 두었다. 속으로야 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며칠 지나고 나서 연결해 놓고 노래를 듣는데 아내가 나를 한참 쳐다봤다. 싼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공짜로 얻어올 스피커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지. 한 소리 듣겠구나 했는데 그냥 흘려보내더라. 내 마음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 스피커는 그때부터 시작해 이십 년 넘게, 그리고 고달픈 외국 생활 하는 내내 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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