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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2.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36)

잘츠부르크에서 밀라노까지 열차를 타고 갔다. 반도이지만 섬이나 다름없는 곳에 살다 보니 국경은 비행기를 타고서야 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 내게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은 건 창밖 풍경이 바뀌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런 절차가 없었으므로.


나름 아내 잘 대접하겠다고 일등석으로 끊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연착으로 갈아타는 곳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떠나는 것부터 10분 넘게 지체되더니 가는 곳마다 주춤대어서 환승역인 로젠하임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갈아타야할 열차는 놓치고. 그것까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음 열차에 좌석 예약비를 다시 내야 한다는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이 높아졌다. 연착에 대한 보상은커녕 예약비를 다시 내라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 정확하다는 독일이 왜 이 모양이냐는 힐난이 고까웠던지 예약비는 받지 않겠단다.


씩씩거리고 열차 타러 나오는데 대합실 출구 위에 있는 전광판에 오페라 공연 광고가 지나갔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조반니>, 10월 7일 오후 8시’. 오나가나 부러운 것뿐이라.


로젠하임에서 베로나까지는 인도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 앉게 되었다. 덕분에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냈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그들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나에도 기품이 넘쳤다. 우리가 은혼식 여행이라고 하니 자기들은 35주년 기념 여행이란다. 우리나라는 와보지 못했고 일본에만 다녀갔는데, 한국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한참을 주워섬겼다. 그저 빈말 같았으면 대충 대꾸하고 말았을 텐데 빈말 같지 않아 성의를 다해 설명을 했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밀라노에 한국인 유학생이 삼천 명이라고 했다. 사실 지금도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음악적인 도시이니 돌아볼 곳이 어디 한두 곳이었을까 마는, 아쉽게도 그곳에서는 라스칼라 극장 본 게 전부였다. 우리가 간다는 말에 며칠 전부터 일정을 짜고 준비한 분에게 우리가 먼저 어디를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행은 지인, 그것도 아주 가까워서 친절을 거절하기 어려운 지인이 사는 곳에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관광으로서는 아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베네치아를 다녀오고, 밀라노에 유명한 패션 거리도 돌아보고, 그 유명한 두오모를 배경으로 사진도 원 없이 찍었다. 밀라노에 왔으면 그래도 라스칼라는 보고 가야하지 않느냐고 말해 겨우 거기 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공연은 고사하고 안에 둘러볼 생각도 못하고, 남은 건 사진 한 장뿐이다. 그래도 교인 대다수가 성악가인 밀라노 한인교회에서 예배드린 것 하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때 느꼈던 감격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로마에서 며칠 잘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관광객으로서 본분에 충실했고. 로마에 가면 한인 민박이 편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민박 주인이 성악으로 유학 왔다가 눌러 앉은 사람이었다. 민박 운영하고 관광안내 하고 산단다. 성악은 오래 전에 접은 것 같고. 그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아오는 항공편에 비즈니스석이 정원을 넘겨 예약이 되었다고 했다. 어쩌라는 말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래서 퍼스트로 승급이 되었단다. 1A, 1B.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열두 시간 남짓 갖은 호사는 다 부리고 오겠구나 싶어서 기대에 부풀었다. 우선 식사 한 번 거창하게 하고. 잠시 있다가 위스키도 종류별로 와인도 종류별로 안주도 종류별로 즐길 생각으로 흐뭇했다. 그러고 잠깐 잠이 들었다. 역시 편안하니 잠도 잘 오는구나 싶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눈 뜨니 영종도 상공 아닌가. 아내는 내가 너무 곤하게 자서 깨울 수 없었다더라. 사실 피곤하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로젠하임 역 전광판에 올라온 오페라 공연 광고>
<이제는 모두 중견 성악가로 활동 중인 밀리노교회 사람들>
<밀라노 나스칼라 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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