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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4.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37)

취직하고 나서 한동안 동창 만날 생각도 동창회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현장을 돌아다니는 직업이다 보니 집에서 출퇴근 하는 날보다 출장 가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동창들 만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아마 취직하고 이십 년쯤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내가 다닌 신일학교는 우리가 첫 입학생이었다. 당시는 중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까지 그대로 진학하는 제도가 있을 때여서 중학교 1회 졸업생인 우리 동기들은 그대로 고등학교 4회 졸업생이 되었다. 우리가 중학교 입학할 때 고등학교도 처음 입학생을 받았거든. 1967년에 우리가 첫 입학생이 되었지만 학교 설립일은 1966년 10월이었다.


2006년 개교 40주년을 맞아 동창회에서 봄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겨우 동창회에 얼굴만 내밀던 상태였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행사를 몇 달 남겨놓고 OB합창단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합창반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꼭 합창반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단다. 행사는 둘째 치고 모처럼 친구들과 함께 노래한다는 생각에 얼른 지원했다.


첫 연습은 종로 국일관 자리에 들어선 호텔 연회장에서 시작했다. 그때 이미 27회 졸업생까지 나왔을 때이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친구들은 자식보다도 어렸다. 2회 선배께서 지휘를 그 선배의 따님께서 반주를 맡아 수고했다. 뭘 불렀는지도 몇 곡이나 불렀는지도 생각나지 않지만 합창 연습을 하던 서너 달 동안은 연습 날짜 기다리는 재미로 살았다.


합창반은 처음엔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신 윤치호 선생께서 지도하셨고 그만 두시고 나서는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신 한태근 선생께서 지도하셨다. 윤치호 선생께서는 학교를 떠나신 후에 연락이 끊어졌지만 한태근 선생께서는 늘 학교 행사에 나오시고 또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곤 했다. 합창 연습 때도 마찬가지로 찾아오셔서 한쪽에 앉아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제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사실 나는 합창반도 아니었고 선생님을 따로 찾아뵌 일도 없기는 했다. 그래도 연습할 때마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우리를 바라보시는 선생님을 뵙는 것이 연습에 나가는 이유가 될 만큼 뵐 때마다 반가웠다. 이미 몇 년 전에 말기암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과 항암치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신 때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2000년도에 말기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선생께서는 주치의인 제자에게 내가 성경을 찬송가로 만들고 있으니 그걸 완성할 때까지만 목숨을 부지시켜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했다. 그 후로 성경 전체를 찬송가 600곡으로 완성하고 그 중 300곡을 골라 <성구 찬송가>라는 책을 만드셨다. 찾아보니 합창 연습에 나오시던 그때 출판기념예배를 드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선생님께서는 2015년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제자들이 끊임없이 찾을 만큼 존경을 받으셨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 찍어두었던 사진을 열어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선배는 한두 분 계셨고 모두 후배들이다. 동기들도 일고여덟은 된 듯싶다. 개교기념행사는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OB합창단은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는데 나는 채 한 해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행사 때 입었던 녹색 턱시도는 얼마 전 귀국할 때까지 옷장 한 구석에 걸려 있었다. 녹색이 학교 상징색이기는 했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옷을 어떻게 입었나 싶을 정도로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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