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우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2005년 9월 27일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찾는데 <역사적 예수 연구의 법칙>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최근 수 년 간 역사적 예수에서 시작해 성서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으니 그 연구에 기준이 되는 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번역서도 아니고 한국 학자가 쓴 책이어서 번역한 학문서적에서 비문 읽느라 들였던 수고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잔뜩 기대했다.
신학이나 성서학에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 워낙 바탕이 없으니 만만한 책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 책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어 두 번을 읽어야 했다. 이백 쪽 조금 넘는 작은 분량이었는데도 닷새나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어려운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용어도 생소한데다가 읽는 내내 번역서에서 보는 비문에 가까운 문장을 헤쳐 나가야 해서 짜증스러웠다. 병기해놓은 원어를 보니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번역어가 있는데도 굳이 생소한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그것이 그 학계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몇 권 되지는 않지만 그동안 읽은 신학이나 성서학 책에서는 그렇게 번역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집중해서 읽지 못해 전체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고 다만 다른 책을 읽을 때 참고할 만한 내용 몇 가지를 기억하기 위해 느낌과 함께 기록으로 남긴다. 워낙 문장이 어려워서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 읽고 이해한 바를 정리하였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더 오래된 자료가 신빙성이 더 높다.
●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내용이 변개되었을 가능성이 낮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와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 사이의 기간이 내용이 변개될 만큼 긴 시간이 아니다.)
● 역사적 인물에 관한 묘사가 역사적 배경에 부합할 때 신빙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예수에 관한 묘사가 예수 당시의 배경에 부합할 경우 그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이 높아지고 초대 교회에 의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예수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인 유대적 배경에 더 부합할수록 예수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상의 결과가 아니라 유대 역사의 산물이라고 더 확신할 수 있다. 어느 구절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적 가정적 관습이나 농경문화, 또는 종교적 관점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그리스 교회가 만들어 낸 것일 수 없으므로 진정한 것이다.
● 예수가 사용한 언어에서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의 특징이 나타난다면 신빙성이 높다. 예를 들어 예수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한 아람어를 사용했거나 복음서에 담긴 구절이 아람어 스타일이나 숙어에 근접할수록 신빙성은 높아진다.
● 독립적인 자료가 일치할수록, 더 오래된 자료일수록,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록일수록, 예수 당시 유대교나 초기기독교의 전통과 다를수록, 더 어려운 말씀일수록, 이미 검증된 예수의 모습과 일치할수록, 예수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부합할수록 신빙성이 높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부합할수록’ 신빙성이 높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당시의 유대교나 초기기독교 전통과 ‘다를수록’ 신빙성이 높다”는 내용은 비록 당시 상황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 신뢰할만하다는 의미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부합해서 신빙성이 높고 부합하지 않아서 신빙성이 높다는 말이니 서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설마 모순인 것을 알면서도 힘께 언급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뭘 잘못 이해한 것일까?
위의 인용 부분 중에서 역사적 배경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신빙성이 높다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복음서들 속에는 초기 기독교와 무관한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보존되었다. 반면에 이방 기독교인들의 할례나 은사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치열한 논쟁들이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초기 기독교가 종교적 필요성에 의해 많은 복음서 전통을 창작했다는 주장을 약화시킨다.
반면에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할 만한 조건이 사실 그렇게 믿을만한 것은 아니라고도 말한다.
● 품질이 더 좋은 자료라고 해서, 평행구절에 나오는 말씀이 더 짧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덜 발전된 내용이라고 해서, 묘사가 더 생생하다고 해서, 기록형태가 다양하다고 해서 더 신빙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얼핏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예시를 따라가다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신빙성이 높은 조건과 신빙성이 낮은 조건이 함께 있을 때는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러니까 신학자가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 서로 관련이 없는 자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면 신빙성이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공관복음의 내용이 다른 자료에도 실려 있다면 그 내용은 신뢰할만하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내용이 다른 자료에 실려 있지 않다고 해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같은 내용이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면 신빙성이 높아지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빙성이 낮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신뢰성 판단기준이 이현령비현령이요 자의적이라는 말인가?
● 성경 내용 중에 신뢰할만한 부분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 뿐 아니라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에 담긴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예수의 말씀이 전승 과정에서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이 달라졌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얼마든 다르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스트라우스(D. F. Strauss)는 어떤 기록이 보편타당한 법칙에 어긋난다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뢰성을 평가할 때 이를 고집할 수는 없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 기록을 신뢰할 만한 증거가 압도적이지 않다고 해서 복음의 신뢰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다. 대체로 성경 연구에 적용하는 기준은 다른 고대사 연구에 적용되는 기준보다 엄격하다.
이쯤 되면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황희 정승 말처럼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다는 건가?
하지만 다음에 인용한 부분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점이다. 이 책 읽고 나서 깨달은 것을 꼽으라면 그 중 첫 번째가 아닐까 한다.
● 공관복음은 신뢰하지 않으면서 후기 자료는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역사적 근본주의이다. P. S. 알렉산더는 학자들이 신약성서의 신빙성은 상당히 의심하면서 랍비 문헌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E. P. 샌더스는 학자들이 요세푸스의 책이 ‘정확한 사실을 전부 기록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학자들이 마태복음 2:16에 기록된 헤롯이 베들레헴 근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가 요세푸스의 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것은 요세푸스의 책이 역사적 사실 전부를 기록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세푸스의 책이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모두 기록했다는 전제를 요세푸스 근본주의라고 한단다. 사실 그동안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 것이 바로 역사성이 인정된 문헌에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저자가 인정한 대로 예컨대 (역사성이 입증된) 요세푸스의 책이 당시 일어난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논리이다. 이 오류는 나도 지금까지 비판 없이 받아들여 왔다. 잘못된 것인 줄 알았으니 앞으로 다른 사람의 논리를 접했을 때 각별히 유의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