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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24. 2023

사람을 생각한다

황주명

생각의힘

2021년 3월 5일


누군가 내게 어떤 기준으로 책을 읽느냐고 물은 일이 있다. 한참 생각하고도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나도 내가 무슨 기준으로 책을 읽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누가 권하거나 인상적인 감상평을 남긴 걸 보고 고르는 게 가장 많은 것 같다. 엊그제 새벽녘까지 읽었던 책이 그렇다. 소설가 자신이 밝혀놓은 뒷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그 글을 읽자마자 책을 주문하고 받자마다 단숨에 다 읽었다. 다음으로 신간소개가 인상적이어서 읽은 책이 꽤 많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의 책이나 오래 전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그 뒤를 잇는다.


어지간한 도서관에는 모두 신간을 신청할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정독도서관은 신청하고 나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보름 안에 비치가 된다. 이 책도 신간 구매요청을 해서 받은 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읽겠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머리말을 읽고는 이유가 생각났다.


“나는 가난과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좌절의 경험도 내게는 없다. 1960년대부터 자동차가 있었고 그 이전부터 식모가 셋이나 있었다. 한국에서 아직은 끼니 걱정하는 사람이 많을 때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 기억력도 좋은 편이어서 코피 나게 공부하지 않고도 경기고등학교에서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성적이 좋았지만 남들처럼 사법고시를 목표로 공부하지 않았다. 그래도 4학년 때 3개월 정도 바짝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붙었다. 27살부터 판사로 재직하다가 39살에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로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제적 여유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재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을 갖추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고 산 사람이다. 그래서 저자는 힘든 일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지만 자기 딴에는 고생을 했다 해도 남들이 겪은 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는 눈물겨운 성공담이나 극한의 고난을 이겨낸 인간 승리 드라마가 없고 따라서 눈물겨운 감동도 없다고 전제하고 글을 시작하고 있다.


아마 어디선가 이 머리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말에 꽂혔을 것이다.


내가 읽은 책 중에는 법률과 법관에 대한 책이 의외로 많다. 나는 법을 논리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조사 분석과 설계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래서 법률과 법관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고 친근하다. 법률 자체야 그럴 일이 있겠나마는 법률을 적용하는 법관 이야기에는 생각 밖으로 감동할 일이 많고, 그래서 그런 책을 많이 골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감동적인 서사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려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읽는 동안 간혹 자기 자랑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어도 그것이 흉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편안하게 펼쳐져서 읽기는 수월했다. 설마 이런 이야기가 전부일까 하고 이제나저제나 한 방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냥 그러다 끝났다. 어느 부분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그렇게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도 낙담할 때가 있구나 싶은 에피소드를 하나 건졌을 뿐이다.


교회 다녀와서 읽기 시작해 저녁 먹기 전에 읽기를 마쳤으니 특별히 아까울 것은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팔십 중반의 로펌 대표께서 그저 떠나기 전에 자기 이름으로 책 하나 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모르겠다. 괜히 신간 구매를 요청한 도서관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전국 고등학교에서 1등 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시험을 치르면 꼴등 하는 아이가 나온다. 그러면 꼴등한 친구가 내가 여기서는 꼴등이지만 전국 석차는 1% 안에 든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이 친구는 꼴등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릴 것이다.”


본인이 당한 좌절이 딱 그 정도였을 것이다. 듣기에 짜증나는 자기 자랑인데 아마 본인은 그것이 자랑인지조차 모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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