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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01.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45)

이십 년 전쯤에 우연한 기회에 오페라 총보 CD를 손에 넣었다. 베르디 오페라 28편, 푸치니 오페라 11편, 바그너 오페라 13편의 총보가 작곡가 별로 CD 두 장에 들어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마존에서 오페라 음반 찾다가 우연히 낚은 월척이었다. 엄청난 내용에 비해 가격은 50달러 정도로 헐값에 지나지 않아서 주문해놓고 받을 때까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오페라 작곡가가 백여 명이 훌쩍 넘기는 하지만 사실 이 세 작곡가 작품에 모차르트 오페라만 추가하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오페라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CD를 받아서 목록을 확인해 보니 나름 오페라를 안다고 했는데 이름조차 생소한 오페라가 적지 않았다. 열어보니 오래된 총보를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았고 아쉽게도 복사는 할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그래도 출력을 막아놓지는 않아서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미 그때 익숙한 오페라 영상은 대충 가지고 있었던 터라 익숙한 작품부터 총보를 출력해 제본한 것을 앞에 놓고 하나씩 감상해나가기 시작했다. 오페라 소개한 책도 함께 펴놓고 줄거리며 작곡 배경도 확인해 가면서. 사실 그때까지 실제로 오페라를 본 것은 불과 몇 편 되지 않았다. 아이다, 돈카를로, 라보엠, 토스카, 세빌리아의 이발사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오페라는 보기 전에 줄거리를 확인하고 공연 때 자막을 띄우기는 했어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아리아 몇 곡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십 년 전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여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내 취미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 중에도 꾸준히 오페라를 하나씩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배달 온 사람이 거실에서 악보와 책을 펴놓고 메모해가며 오페라 감상하는 것을 보고는 아내에게 내가 음악 하는 사람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 몇 달 동안 온전히 오페라에 몰입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오페라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상당 부분이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 베르디의 <에르나니>를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00주년 갈라 콘서트에서 들었던 엘비라의 아리아가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레오나 미첼이 부른 엘비라의 아리아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파바로티가 부른 에르나니, 셰릴 밀른즈가 부른 돈카를로, 루제로 라이몬디가 부른 실바의 아리아는 감동적이었다. 특히 셰릴 밀른즈와 루제로 라이몬디는 그 이후에 그만큼 잘 부른 노래를 듣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아리아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가 뭐냐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에르라니>를 꼽는다.


혜인 아범이 유럽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실바의 아리아를 부를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실바의 아리아는 베이스들이 꼽는 대표적인 아리아에 들어가서 혜인 아범도 이미 이 아리아를 준비한 것 같기는 하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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