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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04.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46)

결혼하고 나서 사우디로 떠날 때까지 정릉교회에 삼십 년 가까이 출석했다. 이유가 있어 서울로 돌아와서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수십 년 함께 부대끼며 살았던 친구들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며 지냈던 시간이 그다.


정릉교회에 첫 여성 장로가 세워진 것이 2002년이었다. 1942년 창립해 꼭 60년 되는 해에서야 비로소 여성 장로가 세워진 것이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다. 교인 중 여성이 압도적 다수였고 갖은 힘든 일은 모두 여성의 몫이었는데 정작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외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내가 출석하는 루터교회에서는 여성 장로 선출이 제도적으로 막혀있다. 그나마 의사결정 기구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정릉교회에 첫 여성 장로이셨던 오정인 장로님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교회 난치병 환우를 위한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처음 손발을 맞췄고, 곧이어 수련원 운영 담당이 되면서 책임자이셨던 장로님과 신나게 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난제를 쾌도난마처럼 해결할 땐 당당한 사업가 그대로이셨고, 수련원 리모델링 계획에 아이들이 환성을 지르더라는 소식에 한없이 기뻐할 때는 여느 할머니와 다르지 않으셨다.


이웃으로 이사 와 한 구역식구가 되기 전까지는 장로님을 그저 선 굵은 사업가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방 하나를 음악감상실로 꾸미고 심지어는 벽 하나를 가릴만한 스크린까지 설치해 연주 실황을 즐기시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클래식 LP 원반 뿐 아니라 그때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클래식 DVD 영상이 벽장으로 하나 가득했다. 물론 부군께서 음악에 대단한 식견과 애정을 가지셨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장로님도 그에 못지않으셨다.


그걸 보고 입 다물고 있을 내가 아니지. 함께 중창을 하던 친구들을 몰고 장로님 댁을 쳐들어갔다. 모두들 음악감상실에서 희귀한 영상을 꺼내보며 몇 시간을 지냈는지 모른다. 장로님 내외분께서는 그런 우리 모습을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음반을 소개해주셨다. 그러다가 부군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장로님이 팝송을 아주 잘 부르신다고. 교회에서 남성 장로 열 명 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으실 만큼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여주신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결국 우리들 아우성 소리에 못 이겨 한 곡 부르셨다. 기가 막혔지.


그때 아주 인상 깊은 DVD를 만났다. 2007년 7월 독일 바덴바덴 오페라극장에서 안나 네트렙코, 엘리나 가랑차, 라몬 베르가스, 루도빅 테지에르가 노래한 오페라 갈라 콘서트 실황음반이었다. 진작부터 안나 네트렙코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그때 <Meine Lippen, sie küssen so heiss>를 부르던 도중 구두를 벗어던지고 무대를 휘저으며 춤을 추고, 그렇게 격렬한 몸짓 뒤에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다시 노래를 이어가는 모습에 그저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의 충성 팬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내 자식이 그와 한 무대에서 노래할 것이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 그로부터 16년 지난 올 봄 자식은 그와 함께 베르디 <나부코> 무대에 섰다.


안나 네트렙코는 <The Woman, The Voice>라는 DVD에 실린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렸을 때 서커스를 배워서 어떤 자세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었는데, 그 영상을 보니 정말 그것이 과장이 아니었다. 하긴 언젠가는 머리를 무대 바깥으로 떨어트린 상태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다.


엘리나 가랑차는 그 DVD에서 처음 보았는데 안나 네트렙코에 가려서 그렇지 노래로는 그에게 뒤지지 않아 놀라웠다. 지금은 세계적인 디바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장로님은 내가 사우디에 부임한 해 겨울에 은퇴하셨다. 며칠 뒤 자식이 결혼식을 올리고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 왔을 때 병문안을 갔지만 많이 고통스러워하신다고 해서 뵙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봄에 영영 먼 길을 떠나셨다. 부군께서도 몇 년 뒤에 따라가셨고. 그 두 분 덕분에 따님과 우리 내외는 좋은 교제를 이어가고 있다. 가끔씩 루터교회에서 예배도 함께 드리면서.



https://www.youtube.com/watch?v=5RfSpRFeW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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