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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02. 2023

노회찬 평전

이광호

사회평론아카데미

2023년 6월 21일


나는 정치인 두 사람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은 떠난 뒤 비로소 그의 진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뒤늦게 진가를 알고 그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지지를 표시해 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날 두 편의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번에 노회찬 의원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게 사실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수정파가 운신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체제에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게 사실일 경우 그가 입을 타격도 타격이지만 어쩌면 한국 정치의 소중한 자산 하나를 영영 잃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그가 걸어온 길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책임질 방법으로 죽음을 생각했다는 말인가. 이제 겨우 책임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놓았고, 태생적으로 거리가 있는 나조차도 그가 짊어지려는 책임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혜원이가 우리에게 온 날, 노회찬 의원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어디 가벼웠으랴마는 그를 보낸 우리의 아픔만큼이야 했겠나. 그래서 기뻐도 기뻐할 수 없었고 아파도 아파하지 못했다. 평생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 애썼던 그의 노력을 많은 이들이 아는데,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다른 이들조차 그의 몸가짐을 탓하는 말을 찾기 어려웠는데, 합리적이지 못한 제도가 기어코 그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를 지지하면서 그 지지를 한 번 제대로 표시해보지도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 마음이 몹시 시리고 아프다. 남은 날 동안 내게 주어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가 꿈꾸었던 좀 더 좋은 세상을 이루는데 작은 힘을 보태는 것으로 그의 유지를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혜원이가 얼마큼 자랐을 때,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에 살 수 있게 된 것이 이런 이들의 수고 때문이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작은 손녀 혜원이가 태어난 날 우리를 떠났다. 그를 가리켜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사람’이라는 어느 정치인의 언급에 대해 그와 동갑내기였던 어느 앵커는 이를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고 정정해 언급했다.


노회찬은 누구인가?


저자는 “노회찬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내가 꼭 그렇다. 평전을 읽는 내내 내가알고 있었던 것은 그저 이미지나 개론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정치인으로, 자연인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노회찬은 대한민국에 명실상부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들고 진보정치 시대를 대중적으로 열어간 대표 정치인이었고, 진보정당의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영혼까지 바친 우직한 정치인이었다.”


“노회찬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현명한 무신론자, 마음이 따뜻한 유물론자,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정치인, 과묵한 달변가, 변화에 열려있고 첨단을 즐길 줄 아는 원칙주의자,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즐긴 남자, 소년의 호기심을 지닌 어른,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았던 페미니스트, 술과 예술을 즐긴 불온한 낭만주의자였다. 이것이 그를 전부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총체적 삶은 농밀하고 풍요로웠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저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공감했던 글을 인용할 뿐이다.


노회찬의 말


“노회찬의 깊숙이 파고드는 공격은 희한하게도 비명보다 웃음을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농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TV토론을 통해 그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가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한 달변가라고 생각하지만 평소 그는 과묵한 편이다. 말이 없지만 필요할 때 정확하고 간결하고 쉽게 이야기해주는 사람,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대답이 막힌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진보 뿐 아니라 보수적인 대중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비법이나 왕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인정하고 신뢰한 데에는 그가 그들을 이해해주고 그들 주장의 합리적인 측면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장을 강하게 몰아붙일 때도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그가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였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진보 진영을 향한 외부의 비판도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다.”


“도무지 합리적인 측면을 찾기 어려운 주장은 가차 없이 비판했는데 이때 그가 동원한 무기는 대개 유머였다. 그의 유머는 실제로는 가장 강도 높은 비판의 다른 표현인 경우가 많았다. 그의 유머가 빛났던 것은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때문이었다. 또한 말과 실천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점도 신뢰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언어와 정치는 보수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는 진보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진보적 해법을 상식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경쟁자와 반대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었으며 논리의 정합성과 정교함을 추구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그런 것들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말의 내용 못지않게 말투와 말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노회찬의 노동운동


“그는 1979년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동기들보다 3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학 들어갈 때부터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당시 현장으로 가기로 결심한 학생들은 신분 노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갈 모든 준비는 대학교 3학년 때 끝냈다. 그에게 대학 생활은 사실상 노동현장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나는 그가 심지어 고려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성품대로 명문학교 출신인 것을 내세우지 않았으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난 졸업생일 경우 학교나 교우회에서 먼저 그가 자기 학교 출신인 것을 밝히고 나선다. 그런데 그가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나 교우회에서 그를 언급한 것을 본 일이 없다. 자랑스러운 동문인데. 평가가 다를 수 있다 해도 모두가 그를 외면할 리는 없지 않은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는 1982년 여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 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용접을 배웠고 용접 2급 기능사 자격을 취득했다. 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현장에 용접노동자로 취업했다. 현장에서 노동현장과 맞닥뜨린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엘리트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그의 용접기술은 수준급이었다. 용접 경력 채 1년도 안 된 노동자치고는 꽤 많은 임금을 받았다.”


그는 뭘 해도 건성으로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와 동갑내기인 어느 앵커는 그를 ‘앞과 뒤가 같은 사람,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지 않는가. 그런 사람이 일을 건성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노동현장으로 간 것을 위장취업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정말 취업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운동을 일찍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평생 변치 않고 그 길을 갔다는 점에서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것이 그 길을 멈추지 않게 만든 동력이었다.”


노회찬의 정치


나는 그를 정치인으로 만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정치인으로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정말 그는 앞과 뒤가 같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었다.


“1인 1표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해 위헌 판결을 받아냈고 그 결과 1인 2표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원내정당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하자 중앙당 차원에서 국회의원 월급을 노동자 평균임금인 180만 원으로 정하고 이를 제외한 세비 전액을 중앙당에 납부하도록 했다. 이로서 막강한 정책 브레인 부대가 구축되었다. 사무총장이었던 그가 주도적으로 관여해서 이루어낸 것이었다. 이 결정은 국민의 시선을 끌었고 당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 결과 정당 지지율이 20%를 돌파했다.”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동안 발의한 법안은 76건으로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과 기본권 보호 8건, 사회적 약자 보호 24건, 복지사회 토대구축 15건 등의 ‘호민관 입법’은 60%가 넘었다. 여기에 재벌개혁 3건, 경제 민주화 2건이 있다.”


“보수 양당을 ‘시커메진 갈아치워야 할 삼겹살 불판’에 비유한 양비론은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는 논리적 설득을 압도했으며 탄핵을 둘러싸고 온갖 해석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공간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고단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진보정당 건설과 관련해 “참 어려웠다. 새로운 역에 도착할 때마다 많은 동료들이 하차했다”고 술회한 일이 있었다. 새로운 역에서 새로운 동료들이 합류해도 힘겨운 판에 말이다.


노회찬의 사람


“그의 부모는 장남이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줄 알았고 이어서 박사 공부를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노동운동을 한다고 털어놓은 그날부터 스케치북을 마련하고 노동 관련 뉴스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1985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줄곧 노동 진보정치 뉴스를 모은 스크랩북을 만들었고 2004년 국회의원이 된 그에게 스크랩북 20권을 보내주었다.”


“처음 김지선을 만났을 때 중국집에서 100% 노동운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가 식사를 마치고 호프집으로 2차를 가서 청혼하자 김지선은 자신은 평생 노동운동을 하면서 살 것이기 때문에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김지선은 이미 몇 차례 구속과 고문까지 당한 단련된 활동가였을 뿐 아니라 청혼 받기 몇 년 전에 평생 결혼하지 않고 노동운동만 한다는 언약식을 맺은 열성 직업운동가였다. 둘의 데이트는 늘 100% 시국 토론이었다. 김지선은 이 남자와 함께 살아도 운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얻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전국 규모의 정치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집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시국 사건으로 몇 년 감옥살이를 했다. 김지선도 원했고 시어머니도 강하게 요청해서 시댁의 도움으로 시험관 시술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입양을 고민하기도 했다. 집도 고정 수입도 없으니 충분한 재산이라는 자격 조건을 충족할 수 없어 포기했다.”


그가 괜히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부모와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노회찬이 노회찬일 수 있었던 것이다.


노회찬의 예술


그는 가난한 집의 맏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 부산에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그가 떠난 후 회고 프로그램에서 그가 첼로를 연주하는 사진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었다. 첼로를 노동운동 하고 연결시키는 건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이니 말이다.


“아버지가 중학생이라면 들어야 할 곡이라면서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음반을 선물하고 30분 넘게 토스카니니에 대해 강연했다. 아버지가 준 베토벤이라는 열쇠로 노회찬은 음악세계의 문을 열었고, 음악은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첼로를 처음 만져본 것도 이때다. 중학교 때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에게, 고등학교 때는 국립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에게 직접 배웠다. 1996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코리아포럼의 초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며 무척이나 감동했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록 음악의 영웅으로 불린 한국계 러시아인 빅토르 최의 무덤이었다.”


“음악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한 그의 생각은 일관적이었다. 예술은 만 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 특수한 계측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그는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회찬의 죽음


“그가 드루킹 김동원이 주도한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로부터 2천만 원씩 두 차례에 걸쳐 받은 후원금은 회계 담당에게 전달되어 선거 비용과 선거 후 부채를 갚는데 사용되었다.”


“나는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인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정치인 노회찬이 특별히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부분은 정치자금 관리였다. 국회의원 시절에 액수가 큰 것도 아니었지만 정치 후원금을 허술하게 한 사실을 알고 나서 ‘나를 불구덩이에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담당자를 무섭게 질타한 적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었다. 유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의 잘못은 한순간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발생한 실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실수라 하지 않고 무거운 벌로 단죄해야 할 부끄러운 판단이라 했다. 자신의 잘못이 빚어낸 개인적 부끄러움의 공적 무게를 그는 이겨낼 수 없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부끄러움’은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지만 존재까지 흔드는 무게를 느끼게 만든 것은 사건 자체보다 여러 차례 국민을 상대로 이를 부인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작은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 노회찬 힘의 원천은 국민의 신뢰였는데 그 원천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남을 험담하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고 화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부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속상한 이야기나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고 의논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속상하고 힘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그의 책임감이 그를 죽음까지 몰아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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