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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7.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51)

사우디에 부임하고 한 해가 넘도록 법인 설립을 마치지 못했다. 차라리 내가 뛰어다니면서 절차를 밟았으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이라도 알겠지만, 법인 설립은 사우디 파트너 측의 업무이다 보니 참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속만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아내는 아내대로 친구들이 언제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난처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하도 답답해서 며칠 휴가를 내고 베를린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막을 벗어나면 좀 덜 답답할까 싶기도 했고 아이들이 신혼집을 어떻게 꾸며놓고 사는지도 궁금했다. 집에 들어가니 내가 묵을 방에 환영한다며 이것저것 장식을 꾸며 놨다. 머리맡에 환영카드도 꽂아놓고. 아들에게서는 전혀 받아보지 못한 환영이었다.


머리 아픈 일상은 다 잊고 아들 내외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도 둘러보고 포츠담 광장에 있는 소니센터에서 맥주도 마시고. 아들 내외가 다니는 학교는 베를린 콘서트하우스 바로 뒤편에 있었는데, 콘서트하우스는 마치 좌청룡 우백호처럼 프렌치돔과 도이치돔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고 앞뜰엔 쉴러 분수까지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 노천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 구경하며 모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식사 때가 되었던가 뭘 사러 가던 길이었나, 아무튼 슈타트미테에 있는 쇼핑몰 근처를 지나는데 아들이 어느 선배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스튜디오 단원을 뽑으니 시험을 보라는 전화였다. 학교 선배도 아니고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선배였는데도 아들을 기억했다가 연락을 준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랬고 아마 아들에게도 이때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것이 유럽 무대에 서게 된 출발점이었으니 말이다. 며칠 후 기차로 대여섯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시험을 보고, 합격해 오페라 스튜디오 단원이 되었다. 오페라 스튜디오는 프로구단으로 말하자면 루키를 키워내는 육성군인 셈이다. 나는 그곳의 단원이 되고 시간만 가면 정단원이 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아무 것도 보장해주는 것 없이 연습단원으로 2년 지내면서 훈련 받는 과정이었다.


아들은 쾰른 오페라극장의 스튜디오 단원으로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다행히 정단원으로 승격되었다. 스튜디오 단원으로 노래하던 2년, 그리고 정단원이 되어서 2년 더 노래하는 동안 아들은 자신을 불러줬던 그 선배와 함께 공연도 하고 그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도 받았다. 아들은 그 후 비스바덴 오페라극장으로 옮겨 10년째 노래하고 있다. 그 선배는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23년 동안 종신단원으로 노래했고, 2022년 5월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떠나는 고별무대에서 궁정가수(캄머쟁어) 칭호를 받은 바리톤 사무엘 윤 교수이다. 궁정가수는 우리로 치면 인간문화재에 해당하는 영예로운 칭호인데 한국인 성악가로는 2011년 소프라노 헬렌 권과 베이스 전승현, 2018년 베이스 연광철이 이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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