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이는 보고 싶고 아들은 공연일정 때문에 여행이 어려워서 혜인 엄마에게 아이만 데리고 리야드를 다녀가라고 했다. 날짜가 되어가서 사우디 입국비자를 신청하니 며느리와 손녀가 내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사우디 기준으로는 아들이 함께 와야 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한국도 호적이 없어져 아들이 중간에 끼지 않으면 가족으로 연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2017년 봄에 비스바덴을 다녀왔다. 마침 카셀 극장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엘렉트라> 객원출연이 잡혀 있어서 온 가족이 카셀을 다녀왔다.
그해 여름에 비스바덴에서 호흐하임으로 이사를 해서 겨울에는 호흐하임을 다녀왔다. 호흐하임은 화이트와인 산지로 유명한 라인가우 지역의 한적한 마을인데, 비스바덴 극장에서 이삼십 분 거리인데다가 모든 환경이 아이 키우기 아주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포도밭이 동네를 둘러싸고 있고 라인가우 지역답게 와이너리도 많아 값싸고 질 좋은 화이트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에는 아들 공연을 두 편이나 볼 수 있었다. 아들의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모차르트 <마술피리>와 바그너 <탄호이저>였다.
<마술피리>의 아리아는 아들이 성악을 시작해 반 년 가까이 발성연습만 하다가 처음으로 부른 두 곡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곡으로 대학입시를 치렀다. 지도하시던 왕광렬 선생께서 아들 음색과 음역에 맞게 잘 골라주신 것이 평생의 대표작품이 된 셈이다. 극장의 배려로 처음으로 2층 객석 중앙에 있는 박스석을 배정받아 자라스트로 역을 맡은 아들을 마음 놓고 사진 찍을 수 있었다.
<탄호이저> 공연을 보러가는 날이었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아들과 작은 충돌이 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있으니 뭐라 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 삭이고 극장으로 갔다. 바그너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짧아야 네 시간이니 각오를 하고 공연에 집중했다. 놀랍게도 탄호이저의 타락을 그리는 1막에서 남녀 무용수들이 전라로 공연하는 것이 아닌가. 비스바덴에서 혼탕을 다니던 경험이 있었는데도 상당히 많은 무용수들이 전라로 공연하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은 2막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아들은 튀링겐 영주 헤르만 역을 맡았는데 조카인 엘리자베트를 향해 <Dich treff ich hier in dieser Halle>를 부를 때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이 일었다. 부모로서 자식이 그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부담이기도 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식이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편안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늘 조마조마하고 혹시나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그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자식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자식의 노래를 듣고 감동했다는 것이 흉잡힐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때 감격을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그날의 공연은 훌륭했다. 아들이 장손이라고 끔찍이 아끼시던 아버님 생각이 잠깐 눈물이 나기도 했고, 극장에 가면서 아들 때문에 편치 않았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때 그 곡은 아래 링크로)
더욱 기뻤던 일은 둘째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혜인 엄마가 결혼 때문에 미뤄왔던 작곡 공부를 마치느라 혜인이와 터울이 많아져서 사실은 조금 걱정을 했었다. 사우디 현지법인의 상황이 어려워지기만 해서 낙심이 되던 중에 큰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