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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25.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61)

사우디 현지법인에 부임할 때 십 년 넘게 그곳에서 있게 될 줄 생각 못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다녀올 때만 해도 불과 석 달 뒤에 서울로 돌아오고, 또 그것이 아주 귀국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우디로 귀임할 희망이 조금씩 옅어져갈 때쯤 아들이 노르웨이 공연 때문에 두 달 집을 비우게 되었다. 마침 방학이어서 한 달은 며느리와 아이들이 그곳에 가서 함께 지내고 나머지 한 달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기로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었다. 무엇보다 여행객으로서가 아니라 그곳 사람으로 일상을 누려보고 싶었다. 널찍한 공원에서 자리 펴놓고 바구니에 가져간 점심 먹으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고, 어디 농가에 가서 그곳에서 난 채소며 과일로 차려낸 저녁을 먹으며 그곳에서 빚은 포도주 한 잔 하는 건 또 얼마나 멋질 것이며, 시끌벅적한 선술집에서 낯모르는 이들과 권커니 자커니 하는 것도 낭만적이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성에서 하룻밤 묵어보는 것이다.


아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성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 있다고 했다. 라인강 계곡을 따라 곳곳에 고성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쇤부르그 성채가 꼭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점심 때 쯤 도착해 곳곳을 돌아보고 객실로 올라가 라인강 쪽으로 난 발코니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또 발코니에 그렇게 나가 앉아있었다.


“쇤부르그 성은 10세기에 지어졌으며 17세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겪었다. 12세기 쇤부르그 대공이 라인강 일대를 다스릴 때부터 그 일가가 거처했다. 250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1689년 팔라틴 전쟁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서 2백 여 년 폐허로 남아 있었다. 19세기말 독일계 미국인인 라인랜더가 오버베셀 주정부로부터 이를 사들여 20년 넘게 수리한 것을 오버베셀 주정부가 1950년 다시 사들였다. 1957년부터 휘틀 가문이 이를 임대해 현재까지 3대에 걸쳐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이 노르웨이에서 돌아오고 처음으로 큰애 생일을 함께 맞았다.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없어서 섭섭했겠지만.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은 늘 꿈같다. 큰애 아침에 학교 가는데 버스 정거장까지 가방 들고 따라가고, 조금 있다가 작은애 데리고 유치원 가고. 오후에는 데려 오고. 그러다 가끔 동네에서 열리는 와인 축제에 다녀오면서 지냈다.


아들 집 앞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파는 와인은 한 병에 팔천 원 남짓하다. 그게 좋은 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향긋하고 달콤해서 입에 달고 산다. 버릇이 드니 책 읽으며 한 잔, 심심해서 한 잔, 심지어는 김치찌개 먹을 때도 한 잔 곁들인다. 축제 열리는 와이너리에 가서 와인을 주문하려니 두 면 가득한 메뉴를 내놓았다. 아내와 그거 한 잔씩 놓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 한 번 쳐다보고, 그러다 옛날 얘기 하나 하고. 바람 좋은 일요일 오후, 여행으로 찾았으면 느껴볼 수 없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누렸다. 그렇게 두 주쯤 지내다가 아들 공연이 있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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