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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06.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65)

작년 가을에 아이들에게 다녀오고 올봄에 다시 간 것은 오로지 안나 네트렙코 때문이었다. 그가 비스바덴극장에서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공연 계약을 했고 아들도 자카리아 역으로 함께 출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십 년 그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게다가 아들도 함께 무대에 서게 되었으니 만사를 제치고 가야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공연 날이 가까워오면서 걱정이 생겼다.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에 우호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연은 예정대로 열렸다. 첫 날 공연에 다녀온 며느리는 극장 앞에서 반대 시위가 있었고 객석에서 일부가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공연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했다.


두 번째 공연에서 드디어 별을 만났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가 생생한 육성으로,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끊어질 듯 말 듯 부르는 아리아를 들은 것이다. 아비가일의 아리아 <언젠가는 나도 떳떳한 몸이 되리라 Anch'io dischiuso un giorno>.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음에 폭포같이 좌중을 압도하는 성량이 아니라 지극히 절제된 소리로 애끓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절창이었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아리아 하나 끝날 때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연주를 멈춰야 하기를 수차례. 박수가 멈출 기색이 없어 그가 손을 저어 만류해야 겨우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의례적인 기립박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 속에 내가 서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감격스럽다. 그리고 그 박수를 받는데 아들이 함께 해서 더욱 감격스러웠고.


아들이 1997년 성악을 시작했으니 올해가 26년째이다. 성악 시작하고 지금껏 쉼 없이 노래해왔다. 하지만 아들이 부르는 노래를 편안한 마음으로 듣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들의 음악을 평가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짝이 없는 관객이기도 했다. 아들은 연주가 끝나고 나면 늘 아내에게 제 반응을 묻곤 했다. 일부러 인색하게 굴 일이야 있었겠나. 부모 눈에는 자식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만 보이니.


연주를 앞두고 아들이 그처럼 긴장하는 모습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베이스에게는 <나부코>의 ‘자카리아’ 역이 가장 넘기 힘든 산이라고 하더라. <나부코>가 ‘나부코’와 ‘아비가일’과 ‘자카리아’ 세 사람이 끌어간다고 할 정도로 비중이 큰 역할이기도 하고, 서곡이 끝나고 등장해 극 초반부를 이끌어 가는데 지금껏 넘어보지 못했던 고음을 뚫어야 하는 아리아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해 전에 역할을 맡고나서 도중에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공연 마치고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긴장했느냐고 물으니 한 해를 쏟아 부었는데도 고음이 해결되지가 않더란다. 그러다 기적처럼 최종 리허설 전날 해결이 됐다더라.


음악을 좋아해서 학교 다닐 때부터 음반을 모았고 늘 그것을 틀어놓고 살았다. 자식을 갓 낳았을 때 집안일 하는데 아이가 칭얼대면 아내는 아이 귀에 헤드폰을 씌워놓곤 했다. 그러면 묘하게도 잠잠해졌다. 그때 모아놓은 음반이 자식의 교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취미가 아들의 진로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자연히 아들이 내 취향을 잘 알고 또 닮아가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안나 네트렙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당신 공연을 보러 멀리 서울에서 오셨다. 함께 있는 사진이 우리 부모님께 큰 선물이 될 것이니 잠깐 사진 찍을 틈만 좀 내다오.” 뭐 이랬단다.


다 끝나고 무대 뒤로 가서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공연 보러 한국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 이러더라. 감격스러웠다. 물론 별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래도 자식 부탁을 잊지 않은 걸 보면 자식이 동료로서 인정을 받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길게 이야기 나누지는 못하고 그저 사진 한 장 찍고 덕담 나누고 끝났다.


팔불출 같은 소리이지만 그날 아들의 공연은 한 마디로 “작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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