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코리아
2021.02
요즘 걸프국가들이 산유국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색하고 있는 산업다각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걸프 산유국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데 이에 관한 자료는 매우 드물다. 중동경제 관련 서적에 대한 리뷰를 써볼까 하고 며칠을 찾았지만 마땅한 책을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이 책 저 책에서 관련된 항목을 추려서 쓰기로 하고 몇 권을 골랐다.
르몽드코리아라는 곳에서 발간한 아랍의 시장경제에 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짐작했던 대로 르몽드의 자매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어판을 발간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언론이 관행적으로 이어오던 강대국 중심의 보도에서 벗어나 주변국의 다양한 모습과 변화상을 취재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아랍은 시장경제 관점에서, 중앙아프리카는 인도주의 관점에서, 동아프리카는 미국과 중국의 격전지라는 관점에서 살핀 책을 발간했다. 하지만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취재한 것은 아니고 그동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한 기사 중에서 권역별, 국가별, 주제별로 묶은 것이었다.
아랍 편에서는 사우디, 이란과 이라크, 두바이와 이집트와 카타르, 레바논과 쿠르드와 같이 네 지역을 다루고 있다. 걸프국가의 주체인 사우디와 두바이와 카타르가 들어 있고 이란과 이라크도 다루고 있어 산유국의 경제다각화 측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첫 장부터 실망스러웠다.
1부 사우디는 식량자급 문제를 다룬 글로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사우디가 식량자급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사우디는 지하수 고갈 우려 때문에 이미 오래 전인 2016년 밀농사를 중단했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2009년 3월에 게재된 기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실린 20편의 기사 중 절반가량이 게재된 지 십 년이 넘었고 나머지도 5년은 넘었다. 몇 개월, 심하면 며칠 사이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국제경제인데 십 수 년 전에 게재된 글을 머리글로 배치한 편집자들의 안일함과 무성의함이 놀랍다.
시의성이 떨어지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기사내용이 구체적이지도 못한데다가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그나마 경제에 대한 것은 몇 편 되지 않고 정치외교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국제정치라고 해도 산유국 사이에서 또는 산유국과 수입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석유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경제 기사라고 분류할 수 는 없는 게 아닌가.
다만, 이슬람 성지인 메카에 대한 기사는 지금까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을 깨우쳐 줬다. 메카는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 번 순례를 해야 하는 곳이다. 기자는 순례가 지닌 종교적 역사적 의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신앙행위를 한낱 종교의례로 전락시키고, 순례를 경제다각화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사우디를 강하게 비판한다.
“메카의 풍경은 철저히 변모했다. 성스러운 도시 메카는 40층짜리 고급호텔, 명품 샵, 객실 10만 개, 통행 터널 60개, 대리석 바닥에 마천루가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콘크리트 정글로 전락해 디즈니랜드와 라스베가스를 섞어놓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통행량으로 인한 대기 오염으로 순례객이 기도보다 기침을 더 많이 한다.”
이뿐 아니라 1천만 원이 넘는 순례비용은 외국인들에게는 재정적으로 막대한 부담이 되는데, 이는 이슬람에서는 성지순례를 떠나기 위해 빚을 지는 것을 금지하는 정신에도 어긋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관광을 산업다각화 정책의 주요 기조로 삼고 있으면서도 이슬람 종주국을 자임하고 있는 사우디로서는 풀 수 없는 난제로 보인다.
사우디뿐 아니라 나머지 지역도 다르지 않다. 두바이와 카타르를 다룬 3부에 실린 기사 중 ‘왕들의 허영’은 비록 게재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산유국이 산업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사업의 뒤편에 감춰져 있는 또 다른 단면을 고발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샤르자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예술 박물관을 갖고 있다고 소문이 나면 카타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박물관을 지으려 하고, 아부다비는 루브르와 구겐하임 박물관을 모아놓고 위엄을 과시하려 한다. 두바이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고 소문나면 사우디가 명백한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체면을 앞세워 그보다 훨씬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한다. 게다가 걸프 국가들은 당장에 세상의 관심을 끄는데 강박증 가까운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글로벌이나 허브 같은 형용사가 붙는다. 어떤 프로젝트, 어떤 학술회의도 그것이 세계적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쇼핑몰도 세계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걸프국가들은 전략적 비전을 가진 세계적 허브이다.”
그동안 사우디가 추진하는 사업의 포트폴리오가 두바이나 아부다비나 카타르와 겹친다는 점을 수없이 지적하면서도 그것이 허영과 시기심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그 나라들 모두 군주가 권력 그 자체인 나라였는데.
고작 이 문장 하나 건진 대가치고 그에 투자한 몇 시간은 낭비였다. ‘시장경제로의 길’이라는 어법에도 맞지 않는 제목을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