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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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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8. 2024

2024.01.08 (월)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으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세기 11:28, 11:31)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慘慽)의 고통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박완서 선생은 외아들을 잃고 겪은 참척의 고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하느님,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한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말씀만 하소서.”     


오래 전에 외손자를 잃은 친구를 보고 이런 글을 남긴 일도 있다.     


“중국 진나라 한 병사가 협곡을 지나다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 잡아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데 어미 원숭이가 배를 좇아 백 여리를 따라오며 슬피 울었다.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서 몸을 날려 배로 뛰어오른 어미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었다.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은 것(斷腸)이다.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외손자를 얻었는데 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그만 어린 생명이 숨을 거두어 그 충격으로 모든 연락을 끊었다. 나도 그때 막 손녀를 얻어 그 생명으로 인해 새 세상이 열린 것 같은 기쁨을 누리고 있던 터라 불과 며칠 사이에 환희에서 절망으로 떨어져버린 그 친구의 아픔이 정말 내 아픔으로 느껴졌다. 자식 잃은 아픔을 단장의 아픔에 비유한다. 그러나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아픔은 단장의 아픔을 겪고 있는 자식을 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식 잃은 딸을 바라보는 친구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큰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다.”     


오늘 창세기를 읽는데 이 구절에 걸려 멈춰 섰다. 수없이 읽으면서도 그저 무심히 지나친 구절인데. 자식을 앞서 보낸 마음이, 그리고 아비 잃은 손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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