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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30. 2024

2024.01.29 (월)

이스탄불 여행기

사우디 현안에 대한 강의로 생각지도 않게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고 있다. 신기하고 의아한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저 한때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했다. 도망 나오듯 떠나온 사우디에 미련이 남았을 리도 없고 좋지 않은 기억을 굳이 떠올릴 것도 아니었다. 주재원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래 근무했으니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나름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떠나온 지 두 해가 넘어 그것이 시의적절한 의견이 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우디를 주제로 의견을 밝히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고 가당치 않게 책도 쓰게 되었다.


기왕 나선 것, 이미 뱉어낸 적절치 않은 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더라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자면 뭐가 잘못되었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살펴야 했다. 그래서 인남식 교수에게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인연을 내세워 조언을 청했다. 다행히 흔쾌히 시간을 내겠다고 해서 단숨에 먼 곳까지 달려와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덤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도 얻었다. 그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중동이라는 공통점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된 것은 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치열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심 그의 내밀한 사유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일주일 동안 함께 걸으면서, 식사하면서, 차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피에레 로티 언덕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면서 나눈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 하다. 자식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지.


그는 지금의 상황을 그저 한때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기는 내게 앞으로도 계속 그 길을 걷기를 권했다. 내가 일선에서 부딪치며 깨지며 얻은 시각으로 현안을 바라봐주기를 부탁했다. 좀처럼 해서는 얻기 어려운 시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관측이 그저 담론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굳이 그렇기야 하랴마는 그것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지난 십수 년의 수고가 실패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그의 위로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응어리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물러서고 덜어내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뭔가 새롭게 시작할 꿈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퇴장을 꿈꿀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 오랫동안 강변북로를 따라 퇴근하면서 화려하게 넘어가는 황혼을 만날 때마다 내 노년이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꿈꿨다. 그 황혼은 정말 아름다웠다. 황홀해서 황혼인가 싶은 정도였다.


이제 그 꿈을 잠시 미뤄놓을까 한다. 어쩌면 굳이 미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은 시간을 거기에 쏟아서 황혼을 더 황홀하게 불타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 앞으로 더 치열하게 시장을 들여다보고, 때로 한발 물러서 시장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살피고. 그러자면 책도 더 보고 사람도 더 만나야겠구나. 힘닿는 데까지.


그러고 보니 첫날 감탄하며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의 황혼이 오늘 이처럼 생각을 바꾸게 된 예표였던 모양이다. 황혼이 지고 나면 또 어떠냐. 야경도 기가 막히기만 하던데.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깨닫고 돌아간다. 그게 깨달음인지 자기합리화인지 착각인지 두고 보면 알 것이고, 오늘은 그저 감사만 생각하기로 하자. 한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 귀한 나눔을 허락한 인남식 교수의 깊은 배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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