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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16. 2024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4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네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국회 비례대표 김예지 의원의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를 읽었습니다. 링크는 댓글에 올렸습니다. 기왕이면 클릭 한 번...


♣♣♣


김예지

사이드웨이

2024년 1월 4일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도가 문명사회를 가르는 척도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든 이런 변화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탄 지하철이 도중에 장애인단체 시위 때문에 멈춰 섰을 때였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는데 어딘지 분간도 되지 않는 곳에 내려 헤매다 보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머리로는 그들의 시위를 이해하겠는데 그것이 짜증을 가라앉히지는 못하더란 말이다.


장애인 당사자이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비례대표 의원인 저자가 지하철을 멈춰 세운 장애인단체 대표에게 시위 방법을 바꾸기를 제안했다. 그러자 대표는 “덜 욕먹는 일을 하면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욕먹는 일을 해야 욕이라도 한다. 그러기 전에는 욕도 안 하고 관심을 아예 꺼버린다”고 대답했다. 저자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시위 현장에서 사과하고 돌아온 후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던 끝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애쓰면서도 시위 방법을 바꾸기를 제안해야 하는 장애인 비례대표 의원, 욕이라도 먹어야 그나마 개선의 실마리라도 잡아볼 수 있겠다는 장애인단체 대표, 그런 이들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잠깐 멈춰 선 지하철에 화를 내는 시민. 이것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히려 희망을 읽는다. 예전에는 이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이가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한 사례가 몇 번 있었지만 성과는 고사하고 뭔가 의미를 둘만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번 회기에도 어김없이 그런 이가 명단에 올랐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으로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 저자가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다는 보도를 듣고도 특별한 기대가 없었다. 그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국회에 그런 이가 움직일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애인 처우 개선을 위해 활동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랬다.


저자인 김예지 의원의 의정활동에 남다른 면이 있기는 했다. 그래 봐야 예전에 같은 위치에 있던 이들에 비해 활동이 많았다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중에 지난해 6월에 있었던 그의 대정부질문이 화제에 올랐다. 환경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라는 물고기’ 이야기를 했다는데,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 그 이야기에 여야의원 구분 없이 기립박수까지 쳤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그런 반응이 단지 코이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렇게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그는 여러모로 관심을 받을 만했다. 시각장애인이 피아노과 일반전형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악보 때문에 고생했다고 3D프린팅 촉각악보를 개발해 특허까지 얻고,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스키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 메달을 따기도 했다. 최근 2년 동안 가이드러너의 도움을 얻어 마라톤 연습을 하고 있고, 이미 10킬로미터 마라톤을 완주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여야의원 구분 없이 기립박수를 치게 만든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법안 발의 건수로도 국회의원 중 최상위에 들었고, 실제로 그가 통과시키기 위해 애쓴 법안 덕분에 종합감기약이나 치약과 라면에도 점자 표기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이 선거공보물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달장애 아동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프로야구에서는 이미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음성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이와 같은 그의 활동이 투쟁과 대결이 일상화된 국회에서 여야의원 구분 없이 기립박수를 보내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코이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새삼 놀란 것이 있다. 점자 표시 하나 해결하기 위해 바꾼 법안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기약에 표시하기 위해 약사법을, 치약과 라면에 표시하기 위해 식품표시광고법을, 선거공보물에 표시하기 위해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했다. 저작권법도, 스포츠산업진흥법도 개정해야 했다. 장애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처럼 단지 한 번 주어지는 비례대표 의원 임기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처음 의원이 되었을 때 주위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안내견과 국회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구색갖추기에 지나지 않았고 국회가 사회의 소수자에게 베푸는 관용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 벽을 향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알렸다. 현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고 왜 필요한지, 이 일에 어떤 사람이 연관되어 있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데이터를 최대한 많이 준비했고, 문제가 무엇이고 해결책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쉽게 설명하기 위해 논리와 표현을 고민했다.


그의 고민은 장애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성소수자를 겨냥해 차별금지법 반대를 당론으로 정한 정당의 소속 국회의원이 당론에 맞서 그들의 생활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고, 동성 간의 혼인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혼인과 관계없이 제공해야 할 지원과 필요한 조치를 국가의 책임으로 정한 ‘가족구성권 3법’을 공동 발의했다. 그는 이 법안이 전통적인 가족 관념을 파괴하는 급진적인 것이 아니며, 이제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법적으로 재정립하고 좀 더 다양하고 열린 모델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법안 발의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몹시 감동했다. 그것이 내가 수십 년 출석하던 교회를 떠나야 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더 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진실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으로서 피아노과 일반전형에 수석으로 입학한 것을 두고 놀라는 이들에게 그것은 장애와 무관한 일이었으며, 자신은 그저 자신이 잘하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는 기억하는 일이 자신의 중요한 습관이자 능력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외우는 습관이 들어야 몸이 덜 피곤하고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도 보폭과 걸음 수로 공간을 파악하고 그곳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이 월등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니, 그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동안 그런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폭력을 당하는 게 보이기나 하지, 배제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지워버리는 폭력은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 피해는 더욱더 치명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아직도 기피시설로 여긴다. 그래서 학교를 세우기 위해 장애 학생 부모들이 주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잔인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사회는 의무를 다한 것일까? 저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애초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수학교가 있지만 그곳에서는 특수학교에서만 가능한 교육을 할 뿐이고 장애인 대부분은 통합과정에서 공부한다. 굳이 ‘통합’하는 제도가 있는 게 아니라 ‘배제’하는 제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 ‘분리’가 시작되면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전 생애주기에 걸쳐 ‘분리’와 ‘차단’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분리’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법은 장애인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디까지 의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든지 보조견 표지를 붙인 장애인 보조견을 동반한 장애인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거나 공공장소, 숙박시설 및 식품접객업소 등 여러 사람이 다니거나 모이는 곳에 출입하려는 때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여서는 아니된다.” - 장애인복지법 제40조 3항


그런데도 권한이 너무 많아 문제가 되는 국회의원인 저자가 식당에서는 물론 자신이 일하는 국회 본회의장에 “회의 진행에 방해되는 물건을 본회의장에 반입해선 안 된다”는 국회법 때문에 반려견과 함께 입장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이에 대해 “존엄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약속(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가” 물으며 “지키지 않는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고 때로는 없는 약속보다 더 유해하다”고 사회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한다. 그러면서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무턱대고 받기만 바란다’고 느껴진다면 그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들의 발목을 그림자처럼 붙들고 있는 이중삼중의 굴레까지 바라봐줄 것”을 호소한다.


그는 임기가 다해가는 이 순간까지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고 있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뤄냈다. 특히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해 그것으로 정쟁으로 얼룩진 국회의사당에서 여야의원의 기립박수를 만들어냈다. 이제 여야의원의 기립박수가 한때의 반응이었는지 그가 만들어 낸 진전에 대한 찬사였는지 구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그가 만들어 낸 진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면 당연히 그에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아니라면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존재는 구색갖추기 그 이상은 아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니 말이다. 설령 구색갖추기였으면 어떠랴. 지금이라도 달라지면 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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