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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19. 2024

2024.02.19 (월)

어쩌다 보니 서울에 돌아와 집을 세 번이나 고치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주 살 집으로 고치는 것이어서 수리비가 이전보다 훨씬 많이 들게 생겼다. 먼저 두 번이나 집을 고쳤던 이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수리비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다. 이전에 조그만 수리를 부탁했을 때 아주 성실하게 일을 마쳤던 이가 있어서 그에게 부탁해 적정한 금액에 원하는 모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집을 고쳤던 이와 처음 계약할 때 수리비를 견적보다 오히려 조금 더 얹어서 계약했다. 당연히 깎자고 할 줄 알고 잔뜩 긴장했다가 오히려 비용을 더 얹겠다니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 결과 큰 추가 비용 없이 생각했던 대로 수리를 마쳤다. 다음 수리 때는 처음과 달리 수리비를 부풀렸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번에는 터무니없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모르긴 해도 견적보다 더 얹어서 계약하자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첫 거래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겠지만, 그것이 되풀이되니 비싸게 받아도 될 것으로 여긴 모양이다. 비록 토목설계이지만 그것으로 평생 밥 먹고 산 내가 설마하니 이만한 일의 견적이 적정한지를 판단 못 했을까.


이번에 계약한 이는 작은 수리를 맡겼을 때 얼마나 꼼꼼하게 마무리했는지 모른다. 당시 생각보다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일하는데 드는 품을 보니 그게 과한 금액이 아니었다. 오늘 견적을 가져와서 살펴보니 오히려 적정하다고 생각한 금액보다 적었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 견적보다 조금 더 높은 금액으로 계약을 마무리했다. 대신 믿고 맡기는 것이니 안 보이는 곳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해주기를 부탁했다.


이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니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다.


발주처 감독으로 시작해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분이 있었다. 뛰어난 능력에도 사내 정치에 밝지 못해 한직으로 떠돌다 뒤늦게 최고위 기술직에 올라 정년을 앞두고 계신 분이었다. 정년을 두 해쯤 앞두고부터 은퇴하고 나서 우리 부서로 오셔서 이끌어주기를 부탁드렸다.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기업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다행히 우리 회사로 오시기로 했다. 회사 규정대로 연봉을 산정해 결재를 올리니 사장께서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건지 나도 그분 지시를 받겠다는 건지 물었다. 처음부터 그분의 지시를 받을 생각이었다고 말하니 당신보다 연봉이 작다는 게 말이 되냐며 그 자리에서 연봉 20퍼센트를 얹어서 결재하면서 일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나도 놀랐으니 모신 그분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연봉협상에서 깎이는 거야 다반사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모신 분이 곧이어 수석부사장이 되고 나중에는 사장까지 올라 5년을 재임하셨다. 평소에 언행이 무례해 탐탁지 않게 여겼던 사장께 나 뿐 아니라 회사가 큰 신세를 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장께 신세 진 게 한 번 더 있다. 신규사업을 추진할 때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실적을 만들어야 시장에 진출하겠는데, 실적을 만들자면 가격을 낮춰서라도 일단 일을 시작해야 했다. 해보지도 않은 일이고 규모도 기존의 사업보다 훨씬 크다 보니 가격까지 낮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수주하는 게 우선이어서 반려될 각오로 금액을 최대한 낮춰 결재를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주가 먼저라면서 거기서 1억을 낮춰 결재하시는 게 아닌가. 덕분에 그 사업이 우리 부서의 새로운 포트폴리오가 되었고 지금도 부서 매출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그 사장께서는 내가 사우디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쾌하지 않은 일로 회사를 그만두셨고 그 이후로 만날 기회가 없어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수소문하면 연락이 닿을 것인데. 오늘이라도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계약한 금액 안에서 원하는 모양으로 수리가 잘 끝나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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