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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1. 2024

잡부 일기 (4)

잡부 일기 2022.03.28


살아오는 동안 나를 지배한 것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월급 받을 때마다 월급 값을 하고 사는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 대접받는 값을 하고 사는지 늘 살폈다. 엊그제까지 사무실에 앉아 지시를 내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매사를 지시받는 잡부의 삶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곳에서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어떻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아니라 과연 내가 일당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염려이다.


잡부 일기 2022.03.29


나중에 할 일 없으면 잡부라도 하겠다는 말에 아내는 펄쩍 뛰었다. 무리해서 몸이 상하면 그게 더 손해라는 것이었다. 막상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뭔가 해보려고 취업 정보를 샅샅이 뒤지고 많은 곳에 지원했지만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했다. 잡부조차도 예순다섯까지만 받는다고 했다. 어찌어찌 한 곳에서 받아준다고는 했는데 지방이라고 해서 잠깐 멈칫했다가 바로 가겠다고 했다. 현장으로 떠나기 전날 아내에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짐을 꾸렸다. 아내가 함께 짐을 꾸리면서 내가 어디 가서 뭘 한다는 건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다면 펄쩍 뛰며 말렸을 것이다.


현장에서 일한 지 세 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혜인 아범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일할 기회를 얻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고, 다행히 설명한 그대로 이해해줬다. 이제 며칠 후면 이곳 일이 끝난다. 기회를 얻어 감사하고,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잘 견디고 있어 감사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어 감사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당분간 계속해야겠다.


잡부 일기 2022.03.30


비 오면 일당이 날아가 짜증스러웠는데 한 달이 되어가니 일당 못 받아도 비가 와서 좀 쉬었으면 싶다.


공통의 화제가 없으니 하루 종일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래도 별 불편한 건 모르겠는데 그게 혹시 이들과 말 섞기가 싫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


마지막 일기를 쓰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일하던 현장의 작업이 끝나서 다른 현장으로 옮길 준비를 하는데 저는 더 이상 나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밥값을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의가 없었습니다. 저 같아도 그 돈 주고 저 같은 사람은 안 썼을 겁니다. 일 시작하고 한 달도 채우지 못했는데 삼백만 원이 넘는 돈을 받으니 미안하더군요.


아무튼 좋은 교훈 하나 얻었습니다. 빈말이라도 “할 일 없으면 잡부나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밥값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게을렀던 건 아닙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열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별로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열심히 하고 잘해야지요.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당연히 잘하는 것이어야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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