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는 동안 나를 지배한 것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월급 받을 때마다 월급 값을 하고 사는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면 대접받는 값을 하고 사는지 늘 살폈다. 엊그제까지 사무실에 앉아 지시를 내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매사를 지시받는 잡부의 삶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곳에서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어떻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아니라 과연 내가 일당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염려이다.
나중에 할 일 없으면 잡부라도 하겠다는 말에 아내는 펄쩍 뛰었다. 무리해서 몸이 상하면 그게 더 손해라는 것이었다. 막상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뭔가 해보려고 취업 정보를 샅샅이 뒤지고 많은 곳에 지원했지만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했다. 잡부조차도 예순다섯까지만 받는다고 했다. 어찌어찌 한 곳에서 받아준다고는 했는데 지방이라고 해서 잠깐 멈칫했다가 바로 가겠다고 했다. 현장으로 떠나기 전날 아내에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짐을 꾸렸다. 아내가 함께 짐을 꾸리면서 내가 어디 가서 뭘 한다는 건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다면 펄쩍 뛰며 말렸을 것이다.
현장에서 일한 지 세 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혜인 아범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일할 기회를 얻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고, 다행히 설명한 그대로 이해해줬다. 이제 며칠 후면 이곳 일이 끝난다. 기회를 얻어 감사하고,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잘 견디고 있어 감사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어 감사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당분간 계속해야겠다.
비 오면 일당이 날아가 짜증스러웠는데 한 달이 되어가니 일당 못 받아도 비가 와서 좀 쉬었으면 싶다.
공통의 화제가 없으니 하루 종일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래도 별 불편한 건 모르겠는데 그게 혹시 이들과 말 섞기가 싫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
마지막 일기를 쓰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일하던 현장의 작업이 끝나서 다른 현장으로 옮길 준비를 하는데 저는 더 이상 나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밥값을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의가 없었습니다. 저 같아도 그 돈 주고 저 같은 사람은 안 썼을 겁니다. 일 시작하고 한 달도 채우지 못했는데 삼백만 원이 넘는 돈을 받으니 미안하더군요.
아무튼 좋은 교훈 하나 얻었습니다. 빈말이라도 “할 일 없으면 잡부나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밥값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게을렀던 건 아닙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열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별로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열심히 하고 잘해야지요.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당연히 잘하는 것이어야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