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닥터 지바고’를 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 보았으니 꼭 50년 전 일입니다. 장장 세 시간이 넘는 대작이라 이 영화 보려고 주말 저녁을 아예 비웠습니다. 50년 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억했던 것과 너무 달라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유리(지바고)의 형인 예프그라프가 유리의 딸인 토냐가 발랄라이카를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칠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발랄라이카를 여덟 살이었던 유리에게 전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내내 발랄라이카를 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유리가 잘 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토냐는 혼자서 배웠지만 아주 잘 친다고 대답합니다. 예프그라프가 “타고난 것이로군(It’s a gift).” 하고 혼잣말 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영화가 감명 깊기도 했지만 ‘타고난 것이 선물’이라는 말의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모양으로 태어납니다. 타고난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타고난 모든 것이 선물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삽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선물이지요. 암, 그렇고 말구요.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늘 읽을 책을 넉넉히 챙겨온다. 작년에는 한국을 다녀오지 못해 읽을거리가 일찌감치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가을 들어서면서부터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와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그리고 에세이 몇 권을 읽었다. 소설은 이야기 따라 가는데 정신이 팔려서 읽는데 그다지 불편한 줄 몰랐고, 에세이도 그랬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해가며 읽어야 할 책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읽다가 생각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면 앞의 내용을 다시 확인해야하는데, 그게 너무 불편했고, 그래서 전자책 사는 게 망설여진다.
인편이 있어 책 몇 권을 구했다. 새삼 종이책이 주는 느낌이 반가웠다. 가능하면 전자책으로 읽겠다던 생각을 바꿨다. 전자책이 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종이책을 읽으면서 누렸던 분위기나 만족감을 얻는 게 영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 번 읽고 끝낼 책이라면 전자책도 괜찮기는 하겠다. 내용을 이해해야 하거나 또 두고 읽을 책이라면 아무래도 종이책이 낫겠다. 무엇보다 아직 내겐 전자책 읽는 것이 종이책 읽는 것만큼 즐거움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음식이란 살자고 먹는 것일 뿐 아니라 먹는 것 그 자체도 즐거움이지 않은가. 책이라고 다르겠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히브리서 12장의 말씀 중 ‘바라본다’는 원어에는 먼저 다른 곳을 향한 눈길을 거둔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돌이켜 보니 내 눈길이 예수를 향하고는 있었지만 온전히 예수께 집중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곳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내 문제의 근원이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부터 예수 이외의 것에서 눈길을 거두는 훈련을 시작하자.
요 며칠 안태근 검사의 간증 문제로 온라인이 어수선하다. ‘죄와 용서’라는 관점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보다는 ‘죄의식’의 관점에서 봐야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는 간증에서 나름대로는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공직을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로 그와 가족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 세계에서는 그것이 관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죄를 지었고, 그 결과로 면직되었다.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억울하게 공직을 그만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고 난 다음의 문제이다. 그러니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런 범죄가 관례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 일해 왔으니 아직도 이게 왜 논란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문제가 어디 검찰에 국한될 일이겠나. 나 자신이나 내가 몸담고 있던 세계 또한 아니라 할 수 있겠나.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늦게라도 죄가 죄로 드러나 다행스럽기도 하다. 드러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The Atlantic이 평창올림픽 단일팀과 관련해서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 보도하면서 문 대통령이 아마 통일을 염원하는 정서를 가진 마지막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언급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산의 아픔을 겪으셨고 우리는 그 아픔을 지켜보며 자랐다. 이미 사회 중추로 자리 잡기 시작한 자식 세대에게도 과연 그런 느낌이 있을까? 그동안 통일 구호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는데, 이번 단일팀에 대한 반응을 보니 그들에게 이산의 아픔은 이미 역사 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이들에게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공존해야 할 이웃 나라가 아닌가 싶다. 공존해야 할 이웃이니 사이좋게 지내기는 해야겠지만, 굳이 그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포기하거나 부담할 생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이미 사회 중추가 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통일 정책’으로는 지지를 얻기 어려울 테니, 결국 대선에서 더 이상 통일 구호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겠나 싶다.
고난 중에 도우심을 구하는 시편의 부르짖음이 내게는 그저 딴 세상 이야기만 같다. 나름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모두 자업자득인 것일 뿐 시편의 기자들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 아니니 그 말씀에 기대기도 참 민망하다. 게다가 늘 뿌린 것보다 더 많은 걸 거두게 하셨으니, 설사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그 말씀에 기대기 민망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 포로기의 시편 말씀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분 탓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성경은 넓게, 깊게 읽어야 한다. 넓게 읽지 않으면 내 논리에 함몰되기 쉽고, 깊게 읽지 않으면 나와 무관한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올해부터 전 교우 QT를 시작했다. 교우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결정한 것이니 따르는 게 옳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성경을 깊게만 읽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에 집중하다 보면 성경을 내 방식대로, 내 욕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한국 교회의 문제가 QT의 폐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까. 교우들을 독려하되 강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름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하겠고.
우리 정부가 올림픽을 계기로 어떻게 해서든 남북화해를 이끌어 내겠다는 데, 개막식에 와서까지 북한에 날을 세우겠다고 드는 미국의 태도가 잔칫집에 재 뿌리겠다는 심산으로 보여 영 마땅치 않다. 그런 중에도 막상 만나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여러 장치를 만든 우리 정부의 심정도 이해는 하겠다.
하지만 미 부통령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보여준 행보로는 태도를 바꿀 여지가 없을 것 같던데, 굳이 북한과 한 식탁에 마주앉는 상황에 몰아넣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들었어야 했을까? 우리에게는 고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지만, 미국으로서는 그런 상황에 몰아넣은 우리 정부가 야속할 수도 있겠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게 되어 억울하기도 할 것이고.
우리 정부나 미국이나 답답하기는 매 일반인 것 같은데, 어디 묘수풀이 잘하는 사람 좀 없나?
어느 인사가 부적절한 사과문을 발표해서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자 다시 한 번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두 번째 사과문에서 “이를 계기로 좀 더 반성하며 낮아지겠다”고 했다. 낮아지겠다는 것은 본디 지체가 높지만 겸양을 발휘해서 낮게 처신하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건 반성의 언어가 아니지 않은가? 설마하니 스스로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기야 했겠나. 혹시 국어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닐까?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던데.
더 많은 번뇌를 풀었던 사람이 더 지혜롭고, 더 큰 고통을 이겼던 사람이 더 강하고, 더 깊은 아픔을 지나왔던 사람의 시선이 더 깊단다. 그렇다면 지혜롭지도 못하고, 강하지도 못하고, 시선이 깊지도 못한 나는 뭔가? 그동안 겪어온 어려움이 한낱 투정에 불과했던 건가, 아니면 어려움을 겪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건가?
조금 전,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미터 결과가 속보로 떴다. ‘이상화 3연패 실패’. 섭섭하기야 했겠지만 굳이 그렇게 표현해야 했을까. 조금 후 기사 제목이 ‘이상화 은빛 마무리’로 바뀌었다. 다행이다.
굳은 살 박힌 발로 드러난 이상화 선수의 최선을 다한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혼신의 힘을 쏟아 경기를 마치고 난 후, 비록 결과가 자기가 기대한 바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조차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이런 패기라면 이들에게 미래를 걸만하겠다.
사과란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물의를 일으킨 사람 중에 깔끔하게 사과한 이를 찾기 어려운 게 아닌가. 말이란 건너갈수록 살이 붙게 마련이니 당사자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억울함을 풀겠다고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지만, 설명이 이어지다보면 과장이 섞이고 때로는 둘러댄다는 게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그러다 보면 사과하려다 오히려 문제를 키우기도 한다.
중진 국회의원 하나가 출입금지 구간에 들어가 선수를 응원하다 구설에 올랐다. 특혜가 일상이 된 사람이니 그런 것에 무감각했을 수 있다. 의도적으로 절차를 무시하기야 했겠나. 깔끔하게 사과하면 좋았을 일을 변명으로 일관하다 보니 이젠 거짓말 시비까지 일었다. 국제연맹회장이 안내해 들어간 것이라는 조직위 설명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그렇게 안내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으니 말이다.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조직위 설명 뒤에 숨지 말고 얼른 나와 사과하는 게 사태를 가장 빠르게 수습하는 길이 아닐까.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 만들지 말고.
겨울올림픽에서 팀워크를 망각하고 뒤쳐진 선수를 챙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앞서 들어온 두 선수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급기야는 청와대에 이들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을 청원하는 글이 올랐고, 하루도 되지 않아 20만 명 이상 서명을 받았다. 청원사이트가 생긴 이래 가장 빠른 기록이라고 한다.
청원인은 앞서 들어온 두 선수를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동료를 버리고 본인들만 앞서 나갔다”며 이들의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생소한 종목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앞서 들어온 선수들이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개인의 영달’이 뭔지 찾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하루도 되지 않아 그 많은 사람이 이에 서명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들이 설명한 대로 착각이나 실수가 아닐까. 설마하니 뒤쳐진 선수를 욕보이려고 그러기야 했겠나. 언짢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징계를 청원하고 하루 만에 수 십 만이 서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모두들 왜 이렇게 쉽게 분노하나? 사는 게 팍팍해서 이런 작은 일에 화풀이를 해대는 건 아닌가? 이 때문에 선의로 출발한 청와대 청원사이트 존폐가 조만간 입방아에 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복음은 아는 것이 아니요, 믿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신 일이 없는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나는 평생 남을 위해 산 일이 없다. 그저 나 자신, 내 일, 내 가족 밖에 모르고 살았다. 능력도 힘도 떨어져가는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이를 깨달았다. 깨달았으니 깨달은 대로 살아야겠는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늦게라도 깨닫게 하셨으니 길을 허락하지 않으실까 기대할 뿐이다.
삼십 년도 넘은 일이다. 후배 하나가 일은 잘하는데 뭘 물으면 제대로 대답을 못해 몹시 답답했다. 그럴 때마다 내 딴에는 도와준다고 이해할 때까지 설명을 되풀이 했다. 설명을 되풀이 하자니 말이 곱게 나갔겠나. 그럴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나중에는 아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이가 좀 편해지고 나서 그 후배가 그랬다. 내가 현장에 보이면 긴장하게 되고, 가까이 와서 뭘 물으면 머릿속이 아예 하얗게 되더라고. 불만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었을 텐데 그땐 그것을 비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후배가 훗날 유능한 기술자로 자리 잡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호사 한 사람이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끊었다. 문득 그 후배에게 나 역시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딴에는 후배를 잘 이끌어주겠다는 생각으로 한 일이기는 했는데, 그 후배는 나와 마주치는 자체가 끔찍했을 수도 있겠다. 지금껏 스스로를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배울 게 있는 선배라고 생각해 왔다. 돌이켜 보니 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할 일이다. 그 후배나 나나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린 나이에 이런 일로 사과하고 사과 받는 게 쑥스럽기는 하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