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 아카이브
동연
2023년 6월 9일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학자로서 변선환은 ‘진보주의’ 노선을 취하였다. 초기에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 신학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에 집중하다가 1960∼70년대 미국과 스위스 유학을 다녀온 후부터 토착화 신학과 종교 간 대화 신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1977년 <월간목회>를 통해 총신대학교 박아론 교수와 “교회(기독교) 밖에도 구원 있는가?”라는 주제로 신학 논쟁을 벌인 후, 1982년 <기독교사상>에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그리고 1984년 <신학사상>에 ‘타 종교와 신학’을 발표하고, 1990년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심포지엄에서 ‘불타와 그리스도’를 발표하여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개종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 간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부족한 부분을 완성(해방)시켜 나가야 한다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교회 내 보수적 목회자, 특히 부흥사들의 비판과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감리교신학대학 홍정수 교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감리교회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해 1991년 10월 감리교 특별총회에서 “감리교 교리에 위배된다”는 평결을 받았고 1992년 5월 7일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서 최고형인 ‘출교’를 선고받았다.
2. 프레시안 2005.09.05
변선환 감신대 학장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했던 것. 당시 변 학장은 최후진술에서 “흑백논리만이 횡행하는 감리교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교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감리교의 세계적 추세”라고 역설했다. “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는 그의 신학적 양심에 한국 감리교계는 ‘사탄의 종’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였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는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2000년간 배타적 선교 정책을 고수해 온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당혹스런 과제였으며, 더욱이 ‘교회 안에서만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독점중계권을 쥐고 있었던 목사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변 학장의 후학들이 최근 펴낸 추모논문집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에서 최대광 감신대 교수는 “복종보다 합리적 사고를, 개인 구원보다 사회복음을, 내면적 초월성보다 사회참여를 중시한다면 보수교회들은 이를 여지없이 교회를 파괴시키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으로 딱지 붙이며 대중을 훈련시켰다”며 “변선환 학장은 정확히 이 대척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해소하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3. 도올 김용옥
변선환 선생이 주장하는바 기독교(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은 지금 새삼스럽게 거론된 바도 아니요 또 이설을 세우기 좋아해서 외쳐대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원화된 한국 종교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확한 메시지이며, 1951년 위팅겐회의가 교회중심주의, 배타주의, 개종주의 선교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즉 서구 식민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국제 기독교사회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968년 WCC는 다이얼로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가톨릭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마르크시스트와 무신론자를 포함하여 선의를 가진 다른 종교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 신학의 역사이다.
다원주의는 비빔밥이 아니다. 비빔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요소를 그 나름의 생성 논리에 따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4. 서창원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한국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한국 사회의 다른 종교와 배타적으로 차별함으로 자기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아왔다.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인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교와 신종교인 대종교, 천도교, 태을교, 경천교, 증산교, 원불교 등을 선교적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도덕적 또는 종교적 단체로는 인정하지만 구원이 없는, 배제해야 할 선교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타 종교 이해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치와 윤리의 핵심인 이웃 종교에 대한 배려가 없는 태도인 것이다. 서구 선교사들의 신학적 편견과 종교적 몰이해를 관습적으로 추종하는 매우 독선적이며 타자의 존재를 배제하는 행이다. “교히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은 종교 다원주의적이며 다른 이웃 종교에 대한 차이의 존중과 타자에 대한 환대이며, 타 종교에 대한 대화의 주체적 대상으로의 인정인 것이다. ... 동유럽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로슬라브 보프는 그의 저서 <배제와 포옹>에서 십자가에서 원수를 사랑으로 포용하신 역사적 예수의 행태는 그리스도인을 배제의 질곡에서 해방시켜 정의와 진실 그리고 평화를 담아내는 진리의 메시지를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해방을 실현하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배제는 세계의 갈등과 삶의 치명적인 악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수난과 상처받은 예수는 그러나 치유하시는 포용의 실천적 상징인 것이다.
5. 채수일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근거로 교회 성장을 추진해온 성장주의자들에게 변선환 교수님의 종교 대화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신학이었을 것입니다.
6. 송순재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그는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정황(사회문화적 정황과 종교적 정황)이라는 조건을 전제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서구 신학에 종속된 상태로 언제나 의존적이며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7. 이정배 현장아카데미 원장
당시는 부흥 목사들의 위세가 대단하던 때였다. 대학 예산보다 10배 이상 커진 대형교회가 여럿 되었고 그곳 목회자들 몇몇이 대학 이사로 파견되었다. 교회 성장을 절대 가치로 여긴 탓에 이들은 신학, 더욱이 토착화 전통을 잇고자 했던 변선환의 신학을 백해무익한 것, 성장의 방해물로 여겼다. 평소 자신들의 신학적 열등감을 교세의 힘으로 벗고자 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교세를 키운 부흥 목사들이 교단 권력자가 되었고, 신학교 이사로 학문에 간섭하면서 마침내 종교재판이 열렸으며, 만장일치로 선생님을 출교시켰다. 그를 아끼던 교단 정치가 중 누군가 선생님께 타협안을 제시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신뢰를 공개적으로 철회하면 출교는 면해줄 것이라 했다. 교수(학장) 은퇴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살길이 아니라 죽는 길로 여겼다.
그의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해를 기려 – 대략 2025년경 – 선생님의 평전도 몇몇 제자들의 수고로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8. 조헌정 향린교회 목사
새벽예배로 유명한 한 대형교회의 성장 세미나에 다녀온 한 백인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늘을 울리는 아멘 기도 소리와 함께 새벽예배가 끝나자 교인들은 가까운 곳에 육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떼를 지어 성경책을 옆에 끼고 오고 가는 차를 피해 가며 도로를 횡단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한국교회는 열은 있으나 빛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9.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소장
2022년 5월 서구 교회의 선교로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 보수 교단에 속한 새문안교회에서 초청한 미국 역사신학자 존 코클리 교수는 “기독교는 번역의 종교”라는 말을 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 상이 각 지역의 문화에 의해서 재해석되어 온 역사라는 것을 밝히며 “하나님도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번역하셨다”며 기독교의 역사는 그렇게 사실상 ‘성육신의 확장’이라는 것도 지적했다.
10. 한인철 연세대학교 교수
2022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일보와 <사귐과 섬김> 부설 코디연구소가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먼저 가장 선호하는 종교를 물었다. 불교 1위, 천주교 2위, 개신교 3위였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호감도였다. 불교는 66.3%, 천주교는 65.4%, 그리고 개신교는 25.3%였다. 여기에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18.1%라는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첫째는 교회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인 삶, 둘째는 교인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언행, 셋째는 재정 불투명성, 넷째는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이 그 이유였다. 한마디로 ‘삶의 결핍’이 불신의 핵심적 이유였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왜 그 삶은 결핍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 기독교 내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니케아 신조, 둘째는 사도신경, 셋째는 사영리이다.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예수와 하나님은 본질상 같다는 것이다. 상당수 개신교인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니케아 신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삶이 빠져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 예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영리는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한국의 개신교는 ‘사영리 기독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사영리는 그 신학적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상호 작용하면 어떤 결과를 만들까? 한 마디로 ‘예수는 믿되 예수처럼 살지 않는 개신교인’을 양산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예수처럼 살 필요가 없다. 예수 믿고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인 예수처럼 살려는 것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이고,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원색적으로 주장하는 개신교인은 많지 않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의 의식 저변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있음이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활동이 ‘가르침의 실천’이었음을 강조한다. 동시대의 가난은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다. 질병과 기아. 이에 따라 예수의 활동은 질병에 따른 고통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과 공동식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고통의 치유와 공동식사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는 자리였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자리였고,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한 모형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가르침과 활동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이 때문에 동시대의 권력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공조한다. 예수에게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죽임당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활동을 지속할 것인가? 예수는 십자가 처형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지켰다.
11. 장왕식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종교재판이 한국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서 효과적이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을 내리는 입장에서 보면 변 교수와 홍 교수의 출교사건은 한국교회의 발전을 저해할 뻔했던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의 싹을 미리 제거하여 자칫 멈출 뻔했던 교회의 부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 유의미한 사건으로 해석될 것이다.
정말 종교재판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지속 가능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는가? 만일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면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바 교회가 쇠퇴해 가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만일 종교재판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세력을 처단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면 그 목적의 달성은 실패에 가까웠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종교재판은 교회에 대해 마이너스의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비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재판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보여주려는 진보 신학을 억압함으로써 교회가 지닌 고집스런 배타성만 부각시켰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만 강화시킨 사건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세속인은 기독교를 더 이상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거나 심지어 신뢰하지 못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때 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의 배타성 때문이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여타 자신과 다른 입장이나 그룹에 대해서 언제나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기에 그런 종교에 귀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의 최고 가치가 관용에 있으며 특히 기독교의 최고 가치는 용서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교회가 다른 종교에 비해 유난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자신과 다른 집단에 대해 비하할 때 세속인들은 그런 기독교의 태도가 기독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런 이해로 인해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성을 강화하는 요소로 여겨져 왔으며, 따라서 선교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2. 정경일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교수
변선환 종교재판은 교권 세력이 신학 교육기관을 장악하고 통제하게 된 징후적 사건이었다. 이 재판은 감리교 신학자만이 아니라 타 교단 신학자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주류 교단의 신학교 학장에다 한국기독교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권위 있는 신학자를 종교 권력이 무참히 짓밟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를 느낀 한국의 신학자들은 종교다원주의 탐구를 회피하고 금기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신학계에서 종교 신학, 비교 신학, 종교적 이중/다중 소속, 탈 종교적 영성, 세속적 영성 등 다양하고 새로운 신학 담론이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한국 종교 신학은 발아하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땅속에 잠들어 있었다. 종교 신학의 기나긴 겨울이었다.
특히 이 종교재판으로 한국 토착화 신학, 종교 신학 문화 신학의 대표적 산실이었던 감리교신학대학은 변선환이 꿈꾸었던 미래적 한국 신학, 아시아 신학 구성에 기여할 창조성을 크게 제약 당했고, 과거지향적 교단 신학의 단순 재생산 기관으로 기능할 것을 강요당했다.
13. 이찬수 가톨릭대학교 교수
물론 어떤 기독교인에게서든지 한국인과 기독교인의 삶은 분리되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다. 한국의 문화적 문법과 정서 등에 어떤 계기가 더해지면서 인생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기존 한국인으로서의 삶 전체가 땅으로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면 천만 명 이상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신학은 한국 사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 자신이 신학과 신앙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신학을 가능하게 한 인생 전체 내지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동력에 대해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가능하게 해 준 한국적 토대를 고민하며 존중했다. 한국의 전통적 문화를 회피하고서는 기독교도 설명될 수 없다고 보고서 다양한 종교들을 포섭하며 승화시키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으로 이어갔다. 자신의 학문도 기독교라는 텍스트와 한국이라는 컨텍스트의 관계를 신학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다 함께 선교의 주체가 되고 상호 객체가 되는 열린 대화의 길을 밝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14. 최범철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사
변선환의 신학적 입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의 신학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켜 ‘종교해방신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실존신학’이라 말하기도 하고, ‘불이적 종교해방신학’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규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의 신학은 마지막 여정까지 하나의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서서 그의 입장을 그렇게 보고 자리매김하여 평가한다고 해도 그의 속뜻을 다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변선환에게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타 종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기본 원칙은 배타주의도 아니며 포괄주의도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변선환은 그들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신 중심’ 비규범적 그리스도 다원주의, ‘실재 중심’ 다원주의에서 점차 ‘구원 중심. ’실천 해방 중심‘ 다원주의 신학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도 변선환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최종점이 아니다. 그는 어디에도 종착할 수 없었다. 그의 신학은 늘 도상에 있었으며, ’사랑하면서 투쟁 한가운데서 자신이 세운 입장을 또다시 부정하고, 부순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변선환은 ‘입장 없는 입장’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