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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20. 2024

마리아 칼라스

박종호

풍월당

2023년 12월 1일


내 기억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마리아 칼라스는 돈 많은 늙은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한물간 성악가였다. 당시 선박왕 오나시스를 가운데 두고 재클린 케네디와 경쟁하는 상대였지만, 어린 내 눈에도 그가 재클린과 경쟁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만큼 사나운 얼굴과 육중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불세출의 소프라노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서였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도 그의 진가를 깨닫기까지는 또 그만큼 세월이 흘러야 했다.


지난봄 이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열어본 영상이 마리아 칼라스의 1958년 파리 공연이었다. 그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만한 기념비적인 음반이었는데, 이 책의 저자인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마리아 칼라스는 그때 이미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섰을 때라고 설명한다.


사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을 때 이것이 과연 전설적인 소프라노의 노래가 맞는지 의아했다. 맑고 청아한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였다. 그러다가 그의 공연 영상을 보면서 아우라라는 게 무엇인지 깨달을 만큼 그는 도도했고 압도적이었다. 오디오와 비디오가 합쳐졌을 때 비로소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할 때 “음성으로 노래하고 눈빛으로 노래하는” 오페라 가수라고 하지 않는가. 연출가 제피렐리가 “오페라는 마리아 칼라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만큼 그가 오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악보 이상을 노래하는 프리마돈나였고, 그래서 오페라가 성악을 넘어서 더 크고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인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듯 타고난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런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가 음악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암기력도 뛰어났다고 말한다.


“칼라스의 음성은 날카로운 금속성에다 찢어지는 소리도 난다. 종종 불안정하게 떨리며 비브라토가 심하다. 이런 비브라토는 오페라에서 선호하지도 않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거슬릴 수 있다. 게다가 음색이 전반적으로 어둡다. 그러니 그의 피치는 완벽하다. 사실 많은 성악가가 음정이 불안한데 칼라스는 역대로 음정이 가장 정확한 성악가 중 하나였다. 또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음정이 정확하기도 하지만 음악을 익히고 표현하는 데 유리했다. 암기력도 뛰어났다. 학창 시절에 악보가 귀해 빌려온 악보를 외워서 훈련했듯이 단시간에 정확하게 곡을 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음 접하는 오페라도 악보를 사진처럼 외우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였다.”


그의 초인적인 노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는 그런 노력으로 자신의 약점조차 강점으로 만들었다.


“칼라스는 고도 근시여서 무대에서 지휘봉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노래까지 다 외우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것이 자기 파트만 생각하던 다른 성악가들과 달리 상대방이 노래하는 동안에도 완벽하게 반응하는 연기의 바탕이 되었다. 또 칼라스는 리허설 전에 남에게 무대를 설명해달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서 장치까지 거리와 소품 위치까지 무대를 자세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공연 내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3년 만에 오페라의 정상에 섰으며 10년 남짓한 짧은 활동으로 오페라의 전설이 되었다. 자식이 또한 오페라 가수로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어 익숙한 일이지만, 오페라 가수라고 해서 노래만 잘하면 그만한 평가가 따라오는 건 아니다.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데는 운도 따라야 하고 전략도 필요한 법이다.


“메트의 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존슨은 칼라스에게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제안했다. 엄청난 명작에 최고의 역할이었지만 20대 초반의 신인이었던 칼라스는 이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80킬로그램이 넘었던 칼라스는 거구인 자신이 열다섯 살의 게이샤를 연기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형편으로 그 거절은 정말 아까운 일이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앙상블 오케스트라이다. 소프라노 한 명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출연진 모두가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좋아야 한다. 혼자 다 하고 박수도 매도 혼자 감당하는 칼라스 같은 스타플레이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칼라스는 모차르트를 멀리했다. 모차르트와 비슷한 조건인 로시니의 오페라도 마찬가지였다.”


“칼라스는 정점에서 바그너와 투란도트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레퍼토리로 범위를 조금씩 좁혀갔다. 그때부터 칼라스는 성공이나 명성보다는 음악성과 완성도를 추구했다.”


이처럼 그는 일찍부터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알았고 정점에 오르기 전부터 레퍼토리를 하나둘 내려놓았다. 그런 용기와 완벽함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칼라스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앞서 이런 그의 처신을 전략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략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신감이 없으면 알면서도 절대로 구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내리막길은 피할 수 없었다. 자기 잇속을 위해 그에게 접근한 주변인들 때문에도 그랬고 오나시스와 만남도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칼라스는 오나시스를 만나고부터 9년간 서서히 파멸을 향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오나시스를 만나면서 그는 연습을 게을리했다. 이전 같은 공연을 할 수 없었고 다시는 무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는데.


그의 내리막길에 위안이 될 만한 공연이 있었으니 바로 잡지 <마리클레르>가 기획한 갈라 콘서트였다. 티켓 가격은 파리 공연 사상 최고액이었으며 신문은 ‘지상 최대의 쇼’라고 보도했다. 프로그램도 화려했다. 1부는 오페라 아리아로 구성되었는데 <노르마>, <세비야의 이발사>, <일트로바토레>의 성격이 다른 세 오페라 주요 대목을 엄선했다. 2부는 <토스카> 2막 전체를 공연했다. 9개국에 생중계된 이 공연이 바로 글을 시작할 때 언급했던 ‘1958년 파리 공연’이다. 그렇게 기록으로 남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저자는 그의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메트(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선별한 칼라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세 작품 <노르마>, <토스카>, <루치아>”, “마지막 순간 형장으로 걸어가기 직전의 안나가 세 아리아를 연속해서 부르는 피날레가 압권인 1957년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를 꼽는다. 칼라스의 마지막 무대는 1965년 파리의 <노르마>와 런던 코번트가든의 <토스카>였다. 이 모두가 영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다른 공연은 대충 본 것 같은데 <루치아>와 <안나 볼레나>는 다른 사람의 공연으로도 본 일이 없다. 이 글 마치고 그것부터 찾아보아야겠다.


책을 읽다가 하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칼라스가 단 한 번 가졌던 마스터클래스에 관한 내용이다.


“칼라스는 197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2주 동안 뉴욕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다. 그의 공개강좌에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그레이스 범브리, 플라시도 도밍고도 참석했다. 칼라스에게 직접 지도받은 학생 중에는 소프라노 바버라 헨드릭스도 있었고 소프라노 이규도와 바리톤 김성길도 있었다. 이때 마스터클래스는 EMI에서 녹음하여 음반으로 나와 있다.”


이 음반도 찾아봐야겠다. 혹시 자식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의 마지막 공연은 한국을 거쳐서 일본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74년 10월 5일과 8일 두 차례 이화여대 강당에서 공연이 치러졌다. 철도청에서 경의선 열차 시간을 조정해 공연 중에 들려올 열차 기적소리를 사전에 막을 만큼 서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서울 공연이 끝난 후 칼라스는 일본으로 넘어가 서울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도쿄에서 두 번, 이어 오사카와 히로시마에서 공연했다. 그리고 1974년 11월 11일 삿포로에서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섰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53세의 젊은 나이로 별이 되었다.


“칼라스는 무대 위에서 자신감 넘치는 오페라 디바였지만 개인 마리아는 대단히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예술가가 아닌 일개 시민으로서의 마리아는 나약했다. 그는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했다. 기본적인 업무조차 할 줄 몰랐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부딪치고 넘어졌으며 남들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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