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는 법이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게 기승을 부리던 열대야도 사라지고 이젠 여름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가보다.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바닷바람은 마치 실크 옷감이 살갗을 스치는 것 마냥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비단결 같은 바람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한동안 ‘바다’라는 필명을 쓰기도 할 만큼 바다를 좋아한다. 내게는 아무것도 가로막힌 것이 없어야 바다인데, 이곳이 정말 그렇다. 나이 들어 일할 기회를 얻은 덤도 감사하지만 그곳이 바다라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현장이 늘 바다를 끼고 있어서 바다도 익숙하고 일출도 그닥 새롭지는 않은데 며칠 전에 본 안개 낀 바다는 몽환적이었다. 아직도 하나 아쉬운 건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인데. 올 장마 때도 제대로 비가 내리지 않았고, 8월이 다 가도록 태풍이 이쪽을 지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일본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쪽으로는 태풍이 거의 오지 않는단다. 나 보자고 태풍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고. 아침에 일어나니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비 조금 뿌리고 그만 사라져 버렸다.
‘바다’라는 필명은 교회 청년들 뒷담화하는 걸 듣고 차마 더 쓸 수가 없어서 ‘얕은 물’로 바꿨다. 어쩌다 자기들끼리 만든 웹사이트를 찾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내 필명이 박살이 나고 있었다.
“바다 좋아하네. 하는 꼬라지는 소리만 요란한 얕디얕은 시냇물만도 못하면서.”
그래서 내 딴에는 엿 먹인다고 ‘얕은 물’이라고 바꿨지만, 쓰다 보니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는 하다.